그래서 소금을 몇 그램 탔다는 그 물의 염도는 혀끝이 알싸해오도록 짰을까, 기대했던 짠맛 대신 미적지근한 물비린내만 남았을까.
낯익은 얼굴인데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을 맴돌기만 하고 끝내 스쳐가 버리는 '수(數)'는 내 것인 듯 내 거 아닌 내 것 같은 것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숫자와 서서히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결국 잽싸게 등까지 돌리고야 말았다.
사회적 나이가 스무 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언제까지나 엄마밥줄에 해님달님 오누이의 동아줄처럼 매달릴 수만은 없었기에, 스스로 벌어먹고 살기위해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 원서를 넣었다. 그렇게 우연히 지원한 곳 중 하나가 은행이었고, 수포자의 은행원 생활은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더 가혹했다.
인생이란, 피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 나를 이끄는 길이 되는 것이라던가. 나는 그렇게 작별을 고했던 숫자와 다시 만나 씨름을 하고 밥을 벌었다.
소금물의 농도 구하기는 나도 늘 헤매던 문제였다. 도대체 물에 소금은 누가, 왜! 타는 것이며, 그걸 굳이 정확한 비율로 맞춰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뭉스러웠다. 그래도 요즘은 문제의 예문이 소금물에만 국한되진 않더라는 점이 의외였다.
이를테면, 원석이 어머니는 마늘장아찌를 만들려고 절임장을 만들었는데, 절임장에 들어간 설탕의 양은 절임장 양의 몇% 인지 구하는 문제 따위가 그랬다. 차라리 흰 우유에 초코시럽을 넣는 문제라면 초딩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를일인데, 절임장, 절임장이라니..
오월이가 소금물의 농도 구하는 문제를 놓고 끙끙대길래 슬쩍 들여다 보았는데, 아, 정말이지 모르겠다. 솔선수범해서 답안지를 여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는 얼굴이 화끈거려온다. 아이에게 해명할 기회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해명을 하기에도 퍽 궁색한 상황이다. 나를 의심쩍게 취급하는 이 팍팍한 현실에 엄마가 수포자였다는 사실은 비밀이니까.
답안지의 힘을 빌려도 오월이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 개념은 쉽사리 머릿속에 자리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소금 2, 물 8!"
"아니, 소금 3, 물 7?" 하며 외쳐보지만,
가족오락관의 최종점수를 빙자한 몇 대 몇을 외치는 소리가 허공에 뿔뿔이 흩어질 뿐이었다.
모자지간에 내려앉은 적막 사이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나는 아이가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풀어냈는지가 궁금했다.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면, 내 관심사는 녀석이 '1인분의 몫'을 해내는가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왕 시작한 문제는 어렵더라도 끝까지 풀어보는 끈기를 가졌으면 하는 무심코 가지게 되는 기대같은것.
아이가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문제들을 자신의 삶과 연결해 배우기를 바라지만, 정작 나부터도 그러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는 울며불며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소금물의 농도를 구하시오'라는 문제를 단순한 수학의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먼저 알려줬어야 했는데.
아마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할 수 있는 여유일지도 모르겠다. 답을 맞히려 애쓰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 정답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져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싶다. 명쾌하고 가볍게. 그렇게.
오늘, 아이의 문제집 속에서 인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