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로 델 토로, <판의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예상했던 내용과 많이 다른 영화였다. 첫 장면부터 암울한 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해피엔딩일 거라 생각했다가 엔딩 장면에서 많이 놀랐다. 할리우드에서도 어린아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에 익숙해져서 서양 영화에서 어린 소녀가 양아버지가 쏜 총에 살해당하는 결말로 극을 닫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엔딩이 끝나고 남는 여운과 답답함은 단지 오필리아가 죽었다는 결말 탓만 하기는 어렵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동화적 상상력을 빌어 폭력이 약자에게 주는 영향을 영웅적인 서사로 가리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판의 미로는 장르 영화로서 판타지와 실재했던 전쟁을 함께 다루고 있다. 결이 전혀 다른 두 장르를 섞기 위해 감독은 캐릭터 설정에 공을 들였다. 모든 등장인물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가질 수 있는 성격으로 구성되어있다. 극의 시기적 배경은 스페인 내전 전후 시기인 1944년이다. 프랑코 정부가 수립했음에도 공화파 잔당은 계속 프랑코 정부군과 대치 중이다. 오필리아의 어머니 카르멘은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권력을 가진 인물과 재혼한다. 그 상대인 비달 대위는 프랑코파 군인으로 숲 속 기지의 최고 지휘자다. 그는 권위주의, 계급주의, 가부장제의 삼위일체를 답습하는 인물로 자신의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의지할 곳 없는 기지에서 유일하게 오필리아를 생각해주는 메르세데스는 군대 내부로 침투한 공화파 정보원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인 오필리아는 전쟁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아동이다. 이 캐릭터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폭력의 고발과 잔혹한 판타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핵심이다.
오필리아는 통제받는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주인공에게 비협조적이고 때로는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환상은 그녀의 불안에서 비롯한다. 오필리아는 열 살 남짓한 아이로,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어떤 어른에게서도 확실히 보호받지 못한다. 카르멘은 임신중독증을 앓다 출산 중에 죽고, 비달은 오필리아가 안중에도 없다. 그나마 호의적인 메르세데스도 누군가를 책임지기는 불안한 상황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성인들로 다른 사람, 특히 약자를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든다. 실제로 전쟁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취약한 집단이 어린 아이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다루는 영화를 상상해보면, 정확히 누가 히어로 역할을 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어른들은 약자들을 책임진다. 이름만 대면 아는 재난 영화들에서 아이를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군가가 희생한다면 그것은 필히 아버지 역할인 캐릭터가 자원한다. 위험에 처한 가족과 약자를 위해 달리고 결국에는 목숨까지도 던지는 아버지상은 보편적인 영화 문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클리세와 실제 상황에서는 일단 자기가 먼저 살아야 한다.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성인이 책임감만으로 섣부르게 행동하다가는 희생자만 늘릴 수도 있다. 비행기 산소마스크 착용만 봐도 보호자 본인이 먼저 신속하게 착용할 것을 당부한다. 기절한 아이를 성인이 도와주는 건 쉬워도 기절한 성인을 아이가 도와주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은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양육자를 가진 정상 가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 약자는 곧바로 사지로 내몰린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다. 이는 곧바로 피해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왜 매체에서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이 완벽하게 보호받을 것처럼 묘사될까? 약자를 먼저 살려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메시지도 있겠지만 극 중에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인물에게 영웅적인 서사를 주기 위한 요소로 약자성이 이용되기 때문이다. ‘구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구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영화에 있어 약자는 게임 퀘스트 NPC처럼 일정한 양식을 답습한다. 이런 캐릭터는 오락영화나 완전히 허구 기반인 재난 영화면 몰라도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등장하면 실제 존재하는 피해자를 특정한 도식에 끼워 맞춰서 볼 위험을 야기한다. 허구적인 캐릭터의 영웅적인 면모를 위해서 약자성이 말 그대로 소비되는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오필리아라는 캐릭터를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내세우며 이러한 클리세를 비틀었다. 결백한 주인공이 무력함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지만 좌절되는 모습은 다른 재난 영화의 어린이 캐릭터보다 입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오필리아 외에도 민간인과 공화파 사람들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버티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폭력과 통제 속에서 살얼음을 위를 걷는 긴장감이 허술하게 풀어지는 부분이 거의 없다. 악역을 맡고 있는 비달을 제외하면 캐릭터들은 납득 가능한 현실적 선택을 한다. 이는 감독이 어린 시절에 스페인 내전 이후 멕시코로 망명한 공화파 사람들로부터 전쟁의 진상을 들으며 폭력에 공감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특성이다. 성장하고 나서도 내전 시기에 대해 충분히 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는 전쟁이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엔딩에서 비달이 쏜 총에 쓰러지는 오필리아는 약자의 편을 들어주는 폭력은 없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준다.
전쟁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는 승전국이 어디인가가 아닌 잃은 사람과 상처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과거다. 감동적인 승리나 휴머니즘적인 관점으로 전쟁을 기념하고 싶은 마음도 알겠지만 거대한 폭력은 무고한 피해자를 동반했다는 사실은 더 자주 환기되어야 한다. 비달이 자기 아들을 공화파에 맡기며 유언을 남기려는 장면에서 이 아이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자랄 것이라는 메르세데스의 대사는 이러한 폭력의 권력화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감독의 말처럼 들린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되었다고 믿은 오필리아의 미소는 메르세데스의 울음기 섞인 자장가와 대비되어 더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전쟁이 죽이는 것은 아이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오필리아의 죽음으로 취하는 수미상관은 이를 잊지 말라는 것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