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 돌란, <마미>
사랑은 한 우주처럼 영원히 팽창한다. 사랑을 한다는 표현보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더 익숙하지 않은가? 감정이 아니라 행위기 때문에 사랑에는 관성이 붙는다. 늘 멈추려고 예상한 범주보다 한 걸음씩은 더 나아가고는 한다. 금을 넘나드는 순간이 누적되면 어느새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벽이 허물어지다, 선을 넘다, 경계를 풀다. 유난히 사랑과 관련해서 이런 표현이 많다. 침범하고 몸집을 불리며 경계도 쉽게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애정을 폭넓게 사랑이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처럼 반듯하게 구분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들을 통틀어 사랑이라 부른다면, 다양한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애정의 방향과 그 형태가 단순하게 한 명칭으로 정의되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도 쉽게 알 수 있다. 개인이 타인과 맺는 모든 상호작용은 지엽적인 낱말이 가리키는 규범적인 이미지로 축약된다. 잔가지를 쳐낸 어휘는 감정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지만 동시에 관계에 대한 상상력과 포용력을 잃기 쉽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친구라는 단어가 긋는 선은 실제 우정으로 엮인 사이 안에서 발생할 수많은 가능성을 차단한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개인이 겪는 관계의 변수와 양상은 나날이 다원화되는데 단어는 굳어있으니 연정과 우정은 어떤 차이를 두고 구별해야 하는지와 같은 영양가 없는 고뇌가 매일같이 난제로 부상한다. 종이 한 장 차이의 소중함으로 우정은 재판대에 오른다. 친구에게 쏟는 애정이 커졌다고 반드시 그게 연애 감정인지 의심해볼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사람과 맺는 상호작용 안에서 움직이는 사랑이 관성을 붙어 더 많은 지분의 애정을 한 사람에게 쏟아 관계의 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관계가 확장되면 다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특정한 사이에 허락되는 애정의 한계치는 암묵적이지만 정해진 것이 아닌가? 애정의 성장통을 겪을 때마다 떠올리는 질문이다. 손 쓸 새도 없이 확장된 사랑은 늘 새로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확장을 겪는 이들에게, 이미 고민을 끝내고 그저 사랑하기로 결심한 이들을 다루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엄마 우리 여전히 사랑하지?”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사랑이잖아.”
<마미>1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찬가 같은 영화다. ADHD로 인해 늘 돌발행동을 일삼는 ‘스티브’와 불같은 성격에 삶을 지속시키려는 의지로 뭉친 ‘디안’은 모자 관계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표현되는 스티브와 디안의 관계는 가족이라는 호칭으로만 요약되기엔 눈부시게 방대하고 섬세한 소우주를 구축한다. 둘은 가족처럼, 친구처럼, 혹은 연인처럼 서로를 아낀다. 둘이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는 상대가 행복해지는 순간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아주 먼 곳에 있어 심지어는 마지막 장면이 진행되는 그 시점까지도 오지 않는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였고, 결국 스티브와 디안은 격리된다. 눈여겨볼 부분은 영원한 고립이나 죽음을 상징하는 결말이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엄마를 위해 살게. 엄마는 내 1순위야 “
스티브는 디안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언젠가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러나 보호시설에 강제로 입주한 이후에도 스티브는 다이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표방한다. 디안을 향한 스티브의 애정은 아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일반적인 애정과는 다르다. 효심이나 존경이라기엔 친밀하지만 죽은 아버지로부터 투사된 연애 감정이라기엔 훨씬 복잡하다. 커다란 애정을 희석하지 않고 날 것으로 전시하는 과격한 사랑법은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에 대한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자 관계라는 틀에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모범적으로 애정을 과시하는 태도와는 동떨어져 있는 태도 때문이다. 위계 구조를 벗어나 사랑을 부르짖는 모습이 연인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해방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널 더 사랑할 거야.”
“반대로 넌 날 덜 사랑하게 되겠지. “
디안 역시 스티브의 애정을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역시도 아들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보여준다. 디안의 감정선은 스티브보다 훨씬 복잡하다. 죽은 남편에 이어서 자식까지도 사고를 쳐대며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삶에 지쳐있다. 스티브를 위해서 구한 직장에서 그 때문에 해고 통보를 받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배상금을 청구받기도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리기 위해 그를 유혹하는 변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이 역시도 스티브가 훼방을 놓아 수포가 된다. 스티브라는 존재가 디안의 애정을 시험하는 시련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디안은 그 모든 재난과 함께 스티브를 사랑한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처럼 체념하거나 초월적인 이해로 아들을 감싸지 않는다. 보호시설로 자식을 밀어 넣는 결정을 내리지만, 여전히 스티브를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게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애정의 우주는 독특하다.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처럼 굳세다가도 판단하나에 허물어진다. 그런데도 이 불안정한 우주는 붕괴하지 않는다.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구성된 사랑의 구조는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유별난 형태를 한다. 디안을 향한 스티브의 감정을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으로 해석하는 여지는 이 때문이다. 스티브가 디안을 ‘아들로서’ 사랑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해석의 요지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과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되어있다. 그 좁고 단단한 상자에 스티브와 디안의 사랑은 다 담기지 않는다. 애정의 성장통을 겪으며 확장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어머니-자식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그 사랑은 여러 번 형태를 바꾸며 그들을 단단히 묶어줄 것이다. 보편적인 애정이 취하는 형태에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넓고 유연한 연대는 질기기 그지없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사랑의 영역에 속해있다. 한 관계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사랑은 <마미>에서 묘사하는 모습처럼 극적인 역동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종유석이 자라듯이 느리고 신중하게 확장하기도 한다. 전자는 요동치는 동세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적나라하게 마주한다. 그에 비해 후자는 어느 날 돌아보면 규정된 선을 넘어가 있어 덜컥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고민과 결정을 내린대도 이미 애정의 팽창이나 수축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그것도 관계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개인이 노력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한다. 그러나 관계의 지속성을 믿어야 한다. 변전과 유지는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될 애정을 믿되 그 애정이 만드는 변혁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관계에 대해서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것은 애정의 성장이 아니라 태만이다. 사랑이 동사라는 것은 행하는 것으로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래 <인연>에서도 이 점을 말하는 가사가 있다.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춰주오. 2 늘 닦아 비추는 그 애정을 통해 관계라는 우주는 유지되고 팽창한다.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3라는 문장에 담긴 불안을 뼈저리게 이해하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변화마저도 사랑의 부산물로 여기는 마음으로, 관계라는 지평선 너머에 번지는 가능성이라는 일출을 마주 해야 한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1, 자비에 돌란, <마미>
2, 이선희, <인연>
3,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