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엄마일 뿐이야
법륜스님은 효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놓았다.
“유교사회에서는 자식은 부모를 봉양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파도 봉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나가는 존재입니다. 아프고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선한 일이지 의무는 아닙니다.”
이 말은 수많은 k-자식들의 부채감과 죄책감을 쓸어내리는 단비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최근 이 말에 좀 더 심을 실어준 사람이 있다. 코미디언 이성미이다. 비밀보장 팟캐스트 전화연결 게스트로 나온 이성미는 우울하다는 엄마 때문에 고민하는 딸에게
“엄마에게 뭘 더 해주지 말아야지.엄마를 독립시켜야 해. 나중에 괜히 엄마를 원망하게 돼. 내가 엄마 때문에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했다고. 그리고 자꾸 해주다 보면 엄마는 의지해. 그러다보면 딸에게 자꾸 서운해하게 되거든. 그러지 말아야해.“
이 말은 지난 나의 세월을 주마등처럼 훑어보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엄마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다. 다만 막내였기 때문에 엄마를 매우 좋아했고, 그래서 힘들었다. 엄마는 아빠와 싸울 때면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나에게 너네 없었으면 이혼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아빠가 싫다고 하면 그래도 아빠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다. 부모는 사춘기 시절 내 앞에서 극렬하게 싸웠다. 부끄럽다는 생각은 나중에 커서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들을 이해한다. 자식이기에 나는 이해해야 했다. 자식은 부모를 용서하는, 부모의 구원이니까. 한 동안 엄마의 감정이 나에게 팽팽하고 끊어지지 않는 선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병이 났다. 우울이라는 병에 걸리고 나서야 나는 부모와 나의 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쉽지 않다. 그 거리는 좁혀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지만 예전보단 훨씬 더 좋아졌다.
그런 엄마가 아프다. 엄마는 병을 안고 사는 난치병 환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깊이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물도 따라주고, 방 청소도 해주고, 밥도 모두 차려주려 했다. 그 때마다 엄마는 옆에서 자신도 할 수 있다며 그 일을 자신이 하려 했다. “엄마 좀 가만히 있어. 좀 앉아있어.”라는 말을 반복하는 내게 아빠는 “엄마가 하려는 대로 냅둬라.” 라며 충고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이제 엄마가 아프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게끔 내버려둔다. 엄마가 도와달라고 하면 “귀찮게 왜 하라그래” 라고 하면서 묵묵히 그 일을 해준다. 나이든 부모가 하기 힘든 청소기 밀기, 걸레질, 빨래는 내가 한다. 하면서 어서 돈 모아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내가 변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 때문에 독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독립을 생각하며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남들이 정해준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고 미련할 지라도 나는 내 나이에, 내 환경에, 나의 서사에 맞게 걸어가고 있다. 체하지 않을 양과 속도로. 그곳에 엄마의 자리는 한 켠 밖에 되지 않는다. 엄마는 나의 모든 것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고, 이젠 나의 인생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져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엄마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떠날 수 있게 된, 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