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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04. 2023

시간(詩間) 있으세요?

분도 아재와 살구나무

# 분도 아재와 살구나무


1

경호강 굽은 허리를 따라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저녁 어스름과 동무하며 거니는 길에 한 줌의 바람이 졸리운 살구나무의 허릴 간질이고 간다 바람의 간섭에 어색하게 몸을 맡긴 살구나무 아래, 조막손에 항상 흰 예식용 장갑을 끼시는, 눈도 희미한 분도 아재가 홀로 서성인다 풀숲에 굴러 들어간 구슬을 찾는 아이처럼 켜켜이 쌓인 그늘 한 잎 한 잎씩을 헤집어 보고 있다 바람에 놀라 창공에 뛰어든 살구를 놋그릇에 담는다 노랗게 부픈 살구를 다독다독 진정시킨다 분도 아재에겐 같이 지내는 어머니가 있다 이곳 성심원에 와 어머니를 갖게 된 것인데 두 분은 항상 같이 다녔다 어머니는 앉아 눈이 되고 아들은 휠체어를 밀어 다리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혼자 나온 것이다 어둔 풀섶을 요리조리 헤치며 찾아낸 살구의 목덜미에 분도 아재의 환한 웃음이 걸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무리의 따뜻한 바람이 잔뜩 웅크린 살구나무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쳤다)



2

지난겨울,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허리높이의 별 세 개짜리 냉장고를 우렁각시마냥 방 안에 앉혀 놓았다 그러자 여지껏 숫총각인 분도 아재는 날마다 각시의 품을 헤치고 들여다보며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짓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은 더위가 밀물처럼 몰려오기 전 재빨리 어머니를 생각하고 허벅지 굵은, 셋을 배꼽에 붙인 선풍기를 방 가운데에 세워놓았 어머니는 듬직한 낭군을 얻어 무더운 한 여름을 냉수처럼 시원하게 지내었다


3

분도 아재의 에는 살구나무 아래 누워있던 거무퇴퇴한 어둠이 따라와 앉았고 노오란 웃음을 목에 건 살구들이 옹기종기 서로의 볼을 맞댄 채 어둔 실내를 등처럼 밝히고 있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의 주름진 손에 놓일 살구들 생각에 잠든 아재의 얼굴엔 살구빛 미소가 가득 달려있다 어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9시 뉴스를 끄고 미닫이 창문을 닫는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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