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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Jun 20. 2024

대추나무꽃

앙(仰) 이목구심서Ⅱ-46


마당귀에 대추나무 한 그루 서있다.

성심원에 온 후 심어놓은 거라 10살 정도 되어 아직은 어린 나무다.

키와 어깨너비가 5~6미터로 아담한 체구를 가졌다.

대략 5년 전부터 열매가 열리고 있다.


유월 들어 맹렬하게 산과 들, 마을을 점령하며 기세를 뽐내던 밤꽃향이 시나브로 이울었다.

그래서 마을은 잔잔한 바람 속에 평온하다.

식용 가능한 유실수 가운데 가장 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가 밤나무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오늘 별생각 없이 대추나무 곁에 다가갔다가 향기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것은 한꺼번에 밀려오는 파도가 아니었다.

이른 봄의 회양목은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향기였다.

그러나 대추꽃 향기는 멈칫거리는 수줍음과 은근함이 있었다.

향기는 가늘지만 끊김 없이 흘러들어왔다.

도둑처럼 몰래 들어와 무방비한 후각을 훔쳤다.

한두 방울 순하게 뿌린 향수처럼 나무 전체에서 달콤함이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향기의 샘을 확인하려고 나뭇잎 사이를 살펴보았다.

아카시 잎처럼 기다란 잎자루에 열네댓 장의 잎이 어긋나게 달려있고 잎사귀마다 한두 개의 꽃을 달고 있다.

이 꽃은 오각형의 별모양 통꽃으로 크기는 0.5센티미터 정도다.

그리고 이 통꽃 안에 다섯 장의 더 작은 꽃잎이 빨판처럼 달려있어 우주에서 내려온 초소형 비행체가 지상에 내려앉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꽃들 하나하나가 상대적으로 거대한 나무 몸체를 공중에서 지탱하고 있는 듯하다.


몇 발자국 떨어져 꽃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맑은 연둣빛이어서 초록잎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작은 꽃 하나에 어린 냥이처럼 무턱대고 코를 들이댄다.

향기를 맡지 못한다.

하지만 얼굴을 들면 분명 달곰한 향기가 은근히 코에 스며든다.

꽃 하나에서 뿜어내는 향기입자는 코에 와닿지 못하지만 수만 개의 꽃향기는 물안개처럼 공중에 모여 주위를 이슬처럼 적시고 있다.

향기에서 잘 익은 대추냄새가 난다.

어쩌면 나무가 하는 일이란 이 향기를 모아들여 동그랗게 빚어내는 것이 아닐까.

어느덧 날이 저물고 박무가 땅을 덮는다.

동쪽 하늘이 노을 지더니 대추나무가 흐려져간다.

하늘도 산도 지워지고 눈앞의 대추나무는 실루엣으로 남아있다.

보이지 않는 향기는 마당에 내려와 우유에 젖어가는 카스테라같이 어둔 밤에 스며들고 있다.

오늘밤 사람들의 꿈이 달콤한 것은 이 향기가 집집마다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접시꽃과 장미들 사이에서 유난히도 작은 꽃들에 마음이 간다.

작은 것은 나를 닮았다.

세상 안에서 나의 존재는 대추꽃보다 작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주목받지 못하는 이를 찾아 더 따스한 눈길로 감싸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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