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ma 2026 리포트로 다시 읽는 디자이너와 AI의 1년
작년에 Figma 2025 AI 리포트를 분석하면서 인상 깊었던 숫자가 있었다.
"AI가 업무 효율을 높여준다" 78%
"AI 결과물을 신뢰할 수 있다" 32%
46포인트 차이. 빠르긴 한데 결과물은 못 믿는다. 쓰긴 쓰는데 그대로 내보내진 못한다.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AI는 이미 실무에 들어왔지만, 결과물의 신뢰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1년이 지났다.
Figma가 올해 또 리포트를 냈다. 이번엔 "State of the Designer 2026". 906명의 디지털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한 서베이다. 그 격차가 좁혀졌을까. 읽어봤다.
이번 리포트의 헤드라인 수치만 보면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AI 도구가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든다: 91%
AI 덕분에 더 빠르게 일한다: 89%
AI로 협업이 나아졌다: 80%
작년에 "빠르긴 한데 못 믿겠다"던 분위기가 "이제 실질적으로 결과물까지 좋아졌다"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디자이너는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보다 직무 만족도가 25% 더 높았다. 비즈니스 임팩트를 체감한다는 응답도 높았다.
작년의 "효율은 인정, 신뢰는 유보" 프레임이 "효율도 인정, 품질도 인정"으로 이동한 것처럼 읽힌다.
근데 여기서 멈추면 그냥 리포트 요약이다. 숫자를 좀 더 들여다보자.
리포트에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었다. "디자인 직업의 현재 상태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더 나아졌다: 36%
더 나빠졌다: 35%
그대로다: 29%
거의 정확히 3등분이다. 같은 시대, 같은 도구를 쓰고 있는데 체감이 완전히 다르다.
이 갈림의 원인이 뭘까.
리포트가 제시하는 가장 뚜렷한 분기점은 AI 활용 태도였다. AI 사용을 늘린 디자이너는 만족도가 올라갔고, AI 사용이 그대로인 디자이너의 40%는 오히려 "일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답했다. 같은 AI인데 누군가에게는 추진력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압박이 된다.
91%가 "AI가 디자인을 더 좋게 만든다"고 답한 리포트에서, 동시에 35%가 "직업이 더 나빠졌다"고 답한다. 이 두 숫자가 공존한다는 게 지금 이 업계의 현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게 있다. 작년 리포트와 올해 리포트를 단순 비교하기엔 조건이 다르다.
2025 AI 리포트는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포함한 2,500명 대상이었고, 2026 State of the Designer는 디지털 디자이너 906명만 대상이다. 질문의 초점도 다르다. 작년은 "AI를 워크플로에 어떻게 통합하느냐"에 가깝고, 올해는 "디자이너가 AI 시대에 어떤 만족도와 크래프트를 경험하느냐"에 가깝다.
그래서 "작년 32%였던 신뢰가 올해 91%로 올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다른 답이다.
그래도 읽을 수 있는 방향은 있다.
작년에 디자이너들은 AI를 "빠르긴 한데 결과물은 못 믿는 도구"로 봤다. 올해는 "결과물의 품질까지 끌어올리는 도구"로 보기 시작했다. 이건 신뢰가 해결된 게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AI를 바라보는 질문 자체가 달라진 거다.
"AI를 쓸까 말까"에서 "AI에게 어디까지 맡길까"로.
재밌는 건, 숫자가 좋아졌다고 해서 디자이너들이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UserTesting의 조사에 따르면, AI 환경에서 91%가 "더 빨라졌다"고 답했지만, 결과물 퀄리티에 "훨씬 더 자신 있다"고 답한 비율은 15%에 불과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패턴이 나왔다. 초기 탐색 단계에서는 자신감이 높은데, 최종 결정에 가까워질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AI가 아이디어를 빠르게 펼치는 건 도와주는데, "이게 진짜 맞는 방향인가"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이야기다.
작년에 봤던 "빠르다 ≠ 신뢰한다" 구조가 사라진 게 아니다. "빠르다 ≠ 확신한다"로 형태가 바뀐 거다.
이번 리포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크래프트(Craft).
디자이너들에게 "크래프트가 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시각적 완성도와 디테일: 58%
사려 깊은 문제 해결: 47%
직관적인 UX: 36%
감정과 즐거움: 35%
제품 전체의 일관성: 15%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크래프트를 "시각적 완성도"나 "감정적 임팩트" 같은 인간적 결과물로 정의한 디자이너들이 더 높은 만족도와 더 강한 비즈니스 성과를 보고했다. 리더가 크래프트를 우선시하는 팀에서 디자이너들은 긍정적 전망을 보일 확률이 2배 높았다.
왜 이게 중요할까.
AI가 "평균적으로 괜찮은 것"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시대에, 차별화되는 건 결국 사람이 부여하는 의도와 섬세함이다. AI가 초안을 만들어주는 건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초안에서 "우리 제품다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여전히 디자이너의 크래프트에 달려 있다. 리포트도 이걸 정확히 짚는다. AI 슬롭(AI slop)이 퀄리티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반대 결과가 나왔다고.
이건 작년에 "판단력이 더 중요해진다"고 썼던 내 논지와 맞닿는 부분이다. 1년 전에는 논리적 추론이었는데, 이제 데이터가 나온 거다.
숫자가 좋아진 이유를 AI 모델이 갑자기 똑똑해져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리포트 데이터를 뜯어보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작년 리포트에서 이미 이런 데이터가 있었다. 성공적인 AI 팀일수록 여러 접근을 탐색하고, 빠르게 반복하고, 사람의 검수를 설계한다. 올해의 긍정적 반응은 모델이 완벽해져서가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AI를 다루는 방식이 더 현실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작년에는 AI가 "초안 생성기" 포지션이었다. 빠르게 뽑아주지만 그대로 쓸 수는 없는 도구. 올해 리포트의 맥락에서 AI는 "크래프트 보조 도구"에 더 가깝다.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디자이너의 판단 영역을 대체하지 않는 위치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리포트에 따르면 프로덕트 빌더의 64%가 2개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답했다. AI 덕분에 비디자이너도 디자인 프로세스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디자이너의 87%는 "창의적 자율성이 최고의 성과를 내게 해준다"고 답했고, 91%는 "명확한 목표와 기대치가 있어야 잘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누구나 AI로 시안을 뽑을 수 있는 시대에, "이 방향이 맞는지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가 오히려 올라간 거다.
Figma가 채용 관련 별도 리서치도 냈는데, 이것도 흥미롭다.
조직의 82%가 디자이너 수요가 늘거나 유지됐다고 응답
채용 담당자의 73%가 AI 도구 활용 능력을 요구
79%가 AI 제품 디자인 역량을 요구
그런데 시니어 채용 비중 56%, 주니어는 25%
AI가 디자이너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AI를 쓸 줄 아는 디자이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다만 시니어 중심으로. 경험과 판단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사람 몫이라는 방증이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작년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빠르지만 못 믿는다"는 46포인트 격차였다. 1년이 지나 숫자는 확실히 좋아졌다. 91%가 더 나은 디자인이라고 답하고, 89%가 더 빠르다고 했다.
하지만 업계가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현실, 최종 결정에서 떨어지는 자신감, 시니어 위주 채용 — 이런 데이터를 함께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올해 숫자가 높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 디자이너들이 AI를 바라보는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작년의 질문: AI를 도입할 것인가. 올해의 질문: 결과물의 품질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AI는 실행의 속도를 바꿨다. 하지만 방향을 잡고, 결과물에 "우리 것"이라는 의도를 부여하는 건 여전히 디자이너의 몫이다. 이 리포트는 그걸 "크래프트"라고 부르고 있다.
도입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건, AI에게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부터 내가 개입할지를 설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