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엘리자베스 하드윅
시옷씨, 답장이 늦었습니다. 먼저 변명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이번 주 내내 프롤로그를 쓰느라 제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어요. 이 녀석이 차지하는 분량이 적어서 얕잡아 보았는데 되려 꽁꽁 묶이는 바람에 이번주를 모두 탕진하고 말았거든요. 겨우 완성해서 출판사에 넘기고 났더니 금요일 저녁 이더군요. 이 편지를 보내기로 한 것이 이번주 금요일이었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우리가 읽기로 했던 책의 분량 역시 적다는 이유로(그런데 오늘 다른 책과 페이지 수, 글자 크기, 책의 행간 등을 비교해 보니 단지 종이가 얇은 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얕잡아 보아서 절반 가량 슬렁슬렁 읽고 이번주에는 어떻게든 다 읽겠지, 하며 미루어 두었습니다. 결국 책을 다 읽지 못하여서 약속한 날짜까지 편지를 보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작다고 얕잡아 보면 큰코다친다, 하는 교훈과 함께... 늦어진 편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변명을 전해 봅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하루종일 이 책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시옷씨의 편지는 책을 다 읽은 뒤에 열어보고 싶어서 아직 펼쳐보지 않고 있었고요. 그래서 오늘 이 책을 빨리 읽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더 커졌어요. 사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 보다 시옷씨의 편지를 읽고 저도 편지를 쓰고 싶어서였지요. 그러나 하루종일 붙잡고 있었는데도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는 몸과 책만 있으면 되는 굉장히 단순한 행위인데 저의 생활은 그것만큼 단순하지 못해서요.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이들이 저를 부릅니다. 한 장 넘기면 “엄마, 이것 좀 해줘” 또 한 장 넘기면 “엄마, 이것 좀 봐봐” 또 한 장 넘기면 “엄마, 뭐 하고 있어?” 그렇게 책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이들 부름에 반응하다 보면 금세 밥할 시간이 됩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 정리를 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면 벌써 반나절이 지나 있어요.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이제 더 이상 슬프지만은 않아요. 그저 받아들이죠. 이것이 저의 삶이고 아이들과의 삶이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아니까요.
결국 저는 이 책을 스무 장 남짓 남겨두고 시옷씨의 편지를 열어 보고 말았습니다. 시옷씨의 상상, 책상, 주워 온 것들, 기차 안의 이야기, 뒷모습들, 이야기를 받쳐주는 시옷씨의 모습. 편지를 보며 시옷씨의 하루를 상상했어요. 어쩌면 제가 시옷씨를 볼 때마다 궁금해했을 것들을요. 저도 요즘 책상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제 책상 역시 몹시 지저분하지만 저는 저의 책상을 정말 좋아해요. 엄마로서의 10년이 이 책상의 중요성을 알게 해 준 절절한 시간이었으니까요. 저는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사실 책상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엘리자베스 하드윅도 저와 시옷씨처럼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었겠죠.
하드윅은 선언하듯이 이 책을 시작합니다.
“당분간 무엇을 하며 살지 정했다. 바뀌어버린, 심지어 뒤틀려버린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지금 살고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무엇이 떠오르는지, 떠오르는 척해야 할지 알 수만 있다면. 결정할 것, 그러면 상실의 심연에서 원하는 것이 떠오를 터이다.(7)”
저는 용기가 생깁니다.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고, 글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모두 저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에요. 시옷씨는 요즘 어떤 글을 쓰고 있나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요. 저는 하드윅의 글, 특히 처음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글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시옷씨의 책이 자주 떠올랐어요. 오랜만에 시옷씨의 책들을 꺼내 보았습니다. 시옷씨의 글은, 하드윅의 글처럼 흘러넘쳐 적혀지는 글 같았어요. 흐르고 흘러 적힐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요. 그렇다면 나의 글은... 고여있는 이야기, 나도 모르게 고여 있던 이야기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적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쓰여지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하드윅의 나열이 궁금했어요. 이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 둔 것은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것들을 천천히 따라가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열은 단순히 단어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생으로 등 떠밀려 위축된 채로 살고, 때로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곳에서 감미롭고 잔인한 생을 겪는다. (...) 출생지의 얼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치장, 표면을 물들인 무늬 같은 것이다. 내 생각에 나는 이방인, 찬장 속의 도자기 세트 같운데에 끼어버린 부조화하고 불안해하는 수입 그릇 같은 사람이다.(18)”
감미롭지만 잔인한 생을, 출생지의 얼룩을, 부조화하고 불안해하는 수입 그릇 같은 자신을, 권태와 나태, 아프고 슬픈, 그렇지만 살아내는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남은 기억과 그 무언가 들을. 그렇게 하드윅은 이 책 <잠 못 드는 밤>에서 사실인지, 허구인지, 그저 떠오른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 속 이야기들을 이어갑니다.
“스무 해도 지난 대학 시절의 깨달음은 약해졌으나 여전히 깜빡이면서 남아있었다. 편안하지만 의아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 표범은 바다에서 나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어쨌든 인내, 또 인내.(108)”
결국 우리는 나왔다가 다시 가라앉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약해졌으나 여전히 깜빡이며 남아있는 기억들이 우리의 생을 반짝이게 해주기도 할 테고요. 우리가 나누게 될 이 편지들도 그런 순간들로, 결국에는 흐릿해질 테지만 반짝이는 시간으로 남을 남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다음 달에는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을 읽고 싶어요.
2024년 5월 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