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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Feb 22. 2022

알베르 카뮈 『이방인』, 실존주의

고전문학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이방인은 알베르 카뮈가 부정(부조리)을 표현한 삼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부정을 표현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책의 내용은 매우 어둡고, 인간존재의 무의미성을 그린다. 단순히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방인>에서 카뮈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양로원으로부터 엄마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하지만 뫼르소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양로원이 얼마나 먼지, 얼마나 걸릴지를 먼저 생각한다. 엄마의 생일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피곤함과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쉴 생각만 할 뿐이다.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뫼르소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



그리하여 이제는 드러누워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 그러한 것들이다.

- 이방인 中 



뫼르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뫼르소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갈등이, 평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만 부조리한 삶에 지친 뫼르소는 이를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관망한다. 뫼르소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없다.' 정도로 말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뫼르소 자신조차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도, 독자에게도 '이방인'으로 여겨질 뿐이다. (후에 사형을 당하기 전 뫼르소는 인간의(자신의) 실존에 대해 깨닫는다.)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 이방인 中 



뫼르소의 주변에는 개를 학대하지만 사랑하는 '살라마노' 영감, 과거 회사 동료에서 연인(?)으로 만난 '마리', 그리고 일명 창고 감독이라 불리는 '레몽'이 있다. 주변 인물들과 직장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지친 뫼르소는 레몽의 초대에 응해 함께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곳에서 레몽에게 앙심을 품은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그리고 레몽은 자신의 눈을 파헤치는 태양빛을 이유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 이방인 中 -






태양, 살인 그리고 사형



뫼르소는 곧바로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다. 이때도 뫼르소는 '이방인'으로 행동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후회하지 않고, 자신의 살인죄를 판결할 재판을 흥미로워할 뿐이다. 또한 뫼르소는 자신을 변호해 줄 변호사 역시 필요 없다고 한다. 법원이 뫼르소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주지만, 뫼르소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면 정상참작이 된다는 변호사의 말에도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재판은 진행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랍인을 죽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에서 이 부분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주로 다뤄지는 것은 엄마가 죽은 후 뫼르소가 한 행위들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행위, 장례식이 있었던 양로원에서 뫼르소가 한 행위(담배를 태우고, 엄마의 시신을 다시 보지 않고, 엄마의 생일을 까먹은 행위), 장례식 이후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신 행위 등... '이방인'처럼 행동한 뫼르소의 행위들은 뫼르소의 살인을 계획적인 것이었다는 근거로 사용된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재판에서 뫼르소는 철저히 배제된다. 아무도 그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 이방인 中



결국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범죄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살인은 계획적이라는 판결이 나오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독방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던 뫼르소는 자신이 사형당하지 않을 가능성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알베르 카뮈






인간이란 무엇일까. feat 죽음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가 서문에서 이방인을 요약한 말이다. 뫼르소는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일까? 뫼르소는 비인간적인 걸까? 인간적이란 것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우리 삶은 누가 만들어 가는 것일까. 나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사회가 만들어 가는 것을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를 만들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이 살아남은 방법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우리의 본 모습이 내가 속한 사회에서, 집단에서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우리는 적절히 나의 모습을 숨기기도, 바꾸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 평판은 모두 내가 속한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뫼르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사회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평판, 감정과 같은 요소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그의 생활에서 이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의 생활에 변화를 주지 않기 때문에.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그는 출근을 해야 하고, 레몽의 사회적 평판은 그와 자신의 관계에서 중요하지 않다.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에. 아랍인의 죽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그리고 인간의 실존에 대해 깨닫는다. 지금껏 '중요하지 않다.' '의미가 없다.'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 이방인 中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주인공은 자신인 것이다. 사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 뫼르소에게 죽음은 해방감을 안겨준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사랑과 증오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뫼르소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보러 와주길 바라며 소설은 끝이 난다.


다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내가 어느 곳에서도 나의 본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옳다는 것을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어느정도의 기준은 필요할 것이다. 지나친 자유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르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회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실존에 대해 깨달은 뫼르소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방인은 읽을수록 새로운 것이 보이는 어려운 책이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고 재미있는 소설인 것 같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이방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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