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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Feb 22. 2022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실존주의 그리고 큐비즘

고전문학



프란츠 카프카 - 변신



대부분의 실존주의 소설은 해석이 다양하고 난해하다. 보통의 소설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 속 모든 상황이나 행동은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실존주의 소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다. 소설은 시작부터 어둡고 불친절하다. 이 난해함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것, <변신>의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한 것 모두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작가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독자들은 각자의 해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더불어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방인>과 비슷하게 <변신> 역시 인간의 실존을 부정(부조리)하게 그린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비관적으로 본 것 같다. '타인은 타인을 절대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인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상대의 어떤 면을 사랑하고 있을까 내면? 외면? (feat. 뷰티 인사이드)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흉측한 해충으로 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다. 잠에서 깨어났더니 해충으로 변해있었을 뿐이다. 시작부터 해충으로 변하는 주인공이라니... 소설이 끝날 때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겠지라는 기대가 무색하게, 그레고르는 끝까지 해충인 채로 살다 죽는다.


그레고르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그레고르는 원치 않는 외판원 일을 하며 부모님과 누이를 부양한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지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기울었던 가세를 일으켜 세워 가족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뿌듯해했고, 누이 그레테를 음악 학교에 보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가족들 역시 그레고르에게 감사해하며 생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레고르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순간에 그레고르는 직장을 잃고, 가족조차 기피하는 대상이 됐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변신 中



물론 처음부터 모든 가족이 그레고르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그레고르를 그의 방에 가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그레테는 그레고르에게 애정을 갖고 그를 보살폈다.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모성애로 그레고르를 꾸준히 챙기려 노력했다. 평소 그레고르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그레테는 그레고르가 먹을 것을 챙겨주고, 그의 방을 청소해 주는 등 앞장서서 그레고르를 돌봤다.


문제는 그레고르가 사라지자 돈을 벌어올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레고르가 사람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를 돌볼 수만은 없었다. 그레고르가 돈을 벌어올 때는 그에게 의존해 무기력하게 살던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사라지고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역설적으로 그레고르의 불행이 가족들에겐 새로운 삶의 의미를 준 것이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새 직장을 구하고, 누이 역시 점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에서 애정은 점차 사라진다. 가족의 변한 태도와 해충의 모습에 적응해 더 이상 숨어만 지내려 하지 않는 그레고르의 행동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여전히 가족을 사랑했고, 가족에게 특히 그레테에게 고마움을 느낀 그레고르는 자신도 모르게 가족들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공포를, 아버지는 분노를 느낀다. 일을 하며 삶의 활기를 되찾은 아버지는 더 이상 그레고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가족에게 해가 되는, 치워버려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해 그를 죽이려 한다. 처음엔 아버지에게 사정하며 그레고르를 살리려 한 그레타 역시 시간이 흐르자 앞장서서 그를 치워버려야 한다고 외친다. 가족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레고르는 결국 자신의 방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레고르가 죽었지만 가족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운이라는 듯 생기를 띠며 새로운 계획과 꿈을 갖고 집을 떠난다.



그레고르의 근심은 당시에 오로지 모두를 여지없는 절망으로 몰아넣은 사업의 불운을 식구들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잊어버리게끔 하는 데 전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당시 그는 아주 특별한 열의를 다 바쳐 일을 시작했었고 단 하룻밤 사이에 보잘것없는 점원 보조원에서 외판사원이 되었다.

외판사원은 물론 돈을 버는 방식이 아주 달랐고 작업의 성과가 즉시 수수료의 형식으로 현금으로 변했으니 그것을 놀라고 기뻐하는 집안 식구들 앞 테이블 위에 놓을 수 있었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 이후에는 한번도 그런 시절이, 적어도 그런 빛을 띠고는 되풀이되지 않았던 것이다.

후일 그레고르가 돈을 많이 벌어, 온식구의 낭비를 감당할 수 있었고 실제로 감당하기도 했건만 말이다. 사람들이 익숙해졌던 것이다. 식구들이나 그레고르 역시도, 식구들은 돈을 감사하게 받았고, 그는 기꺼이 가져다주었으나, 특별한 따뜻함은 더 이상 우러나지 않았다.

- 변신 中



난해한 <변신>을 가장 직관적으로, 가장 쉽게 이해시켜주는 것은 영화 <뷰티 인사이드>라 생각한다. 자고 일어나면 외모가 변해 평생을 숨어지내던 남자 주인공이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뷰티 인사이드>는 우리가 상대방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두 작품 모두 내면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결론은 다르다. <변신>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외면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뷰티 인사이드>는 다시 사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내면의 손을 들어준다.


과연 우리는 <변신>과 <뷰티 인사이드>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내면을 더 중요시한다고 생각할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 선택적으로 내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고르처럼 내 주변 사람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된다면, 난 이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전과자였다면? 트랜스젠더 또는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라면? 옛날엔 망설임 없이 똑같이 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역시 다른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내가 경험한 사람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 그 사람의 본질적인 모습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면?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의 내면조차 그 사람에겐 외면이었다면. 난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페르소나 (feat. 큐비즘)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만나 수많은 집단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우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에 따라, 집단에 따라 더 적절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둠보단 밝음을, 부정보단 긍정을 선호한다. 즉, 우리가 상황에 맞게 적절한 페르소나를 골라 보여주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일 것이다. 물론 나라는 사람이 변해서 다른 페르소나를 가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건 우리는 멀티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본질은 '나'라는 한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 당황한다. 이 당황이 신선함으로 갈지, 기피로 갈지는 알 수 없다. 역시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상대의 여러 모습이 나 또는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우린 상대의 어떤 모습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이 말을 실천하고 있을까. 상대의 여러 모습을 모두 존중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익숙한 것을 편하게(긍정) 느끼고, 다른 것은 불편하게(부정)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큐비즘, 즉 입체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파블로  피카소 - 아비뇽의 처녀들



여러 방향에서 본 대상의 입체적인 모습을 평면적인 한 화폭에 담은 큐비즘은 괴상하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누군가의 페르소나를 보고 있는 모습과 유사하다 생각한다. 우린 누군가의 수많은 페르소나 중 주로 한 가지 페르소나만 본다. 만약 같은 각도에서 누군가의 여러 페르소나를 동시에 본다면 큐비즘처럼 기괴하게 보이는 것 아닐까. 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질 수 있지만 여기서 그만하려 한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하기에,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옳다는 오만은 버리고, 나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편견을 버린다면 언젠간 다름이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 실존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방인>과 <변신>은 나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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