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name Feb 22. 2022

한강 『채식주의자』, 세계에 대한 질문

현대소설



한강 - 채식주의자



한강 작가는 개인적으로 임솔아 작가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작가다. 두 작가의 작품은 모두 어둡고 어렵다. 하지만 다독을 할수록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 좋다. 어둠과 밝음은 동전의 양면이라 생각한다.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밝음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어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쓰는 두 작가에게 끌리는 것 같다.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피와 죽음이 자주 등장한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강추...bbb)에서도,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리고 이번에 쓸 소설인 <채식주의자>에서도. 작가는 피와 죽음이라는, 거북하지만 인간과 뗄 수 없는 요소를 통해 세계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연히 본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는 그녀의 작품을 질문으로 봐달라고 했다. 이 인터뷰를 본 후 <채식주의자>의 난해함이 조금은 가셨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다시 <채식주의자>를 읽으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채식주의자>는 세 개의 중편소설인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엮어 만든 연작소설로, 주인공 영혜의 이야기이자 영혜의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 '몽고반점'은 영혜의 매부,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한강 작가는 '몽고반점'으로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각 소설은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완결성을 보인다. 하지만 세 소설을 따로 읽으면 난해하고 거북하기만 할 수 있다. 세 소설을 같이 읽었을 때야 비로소 하나의 관통된 이야기로 작가의 질문에 공감할 수 있다.(물론 여전히 난해함과 거북함이 느껴지긴 한다..)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끝났다”

 “그렇다면 인간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며
살아내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질문이 이어졌다”

- 한강 작가 인터뷰 中






원치 않는 선의는 폭력이다




선의는 아름답고, 폭력은 잔인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의와 폭력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강 작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 명제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럴까? <채식주의자>는 수많은 선의와 폭력을 그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의는 선의를 가장한 폭력이다. 누군가에겐 아름답지만, 누군가에겐 폭력적이다. 하비 덴트(투 페이스)를 통해 정의와 불의가 동전의 양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다크나이트>처럼, 영혜를 통해 <채식주의자>는 선의와 폭력 역시 동전의 양면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영혜는 외모도, 옷차림도, 성격도 모든 것이 평범하다. 고기를 좋아하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 정도가 영혜의 남다른 점이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평범함이 좋아 영혜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뜨겁지는 않지만 권태롭지도 않다. 하지만 영혜가 꿈을 꾼 후 모든 것이 변한다.



그 꿈을 꾸기 전날 아침 난 얼어붙은 고기를 썰고 있었지. 당신이 화를 내며 재촉했어.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

다음날 새벽이었어. 헛간 속의 피웅덩이, 거기 비친 얼굴을 처음 본 건

- 채식주의자 中



영혜는 육식을 거부한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도. 집에 있는 고기도 모두 버린다. 갑자기 변한 영혜를 그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상한 사람, 특이한 사람 취급을 한다. 영혜와 가장 가까운 남편과 가족조차도... 겉으로는 영혜를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 외부인과 달리 영혜의 가족은 '척'조차 하지 않는다. 영혜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대한다. 가족에게 영혜는 고기를 좋아해야만 했고, 고기를 먹어야만 했다. 끝까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자 영혜의 아버지는 억지로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든다. 가족 중 누구도 이를 막지 않고 방관하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영혜는 손목을 긋는 것으로 가족의 폭력에 저항한다.


병원에 입원한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에 영혜의 어머니는 흑염소로 만든 한약을 먹이려 한다. 여전히 영혜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없이 영혜를 위한다는 이유에서다. 다음 날 아침 영혜는 상의를 모두 벗고 병원 앞 벤치에 앉아 햇빛을 쐰다. 이 모든 사건은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난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영혜는 채식을 하고, 영혜의 남편은 이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영혜는 계속해서 육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는 것을 더 줄인다. 대신 햇빛을 더 오래 쐰다.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 채식주의자 中



인혜의 남편은 미디어 아트를 주로 하는 화가다. 그는 백화점, 광고, 정치인 등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현실은 거짓이라 생각한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난민과 노숙인 등의 눈물이 진짜 우리 현실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좀 더 원초적인 것이지만, 고요하고, 은밀하고, 매혹적이면서 깊은 것이다.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린아이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몽고반점이 영혜에게 있다는 것을 안 후, 그는 자신이 그리고 싶었던 이미지를 깨닫는다. 영혜의 몽고반점과 남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꽃을 그린 후 남녀가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그 남성은 자신이 되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모든 욕망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영혜는 '꽃'에서는 욕망을 표출한다. 자신의 몸에 그린 꽃 그림을 간직하고 싶어 씻지도 않는다. 남성에 몸에 그린 꽃을 보고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 처음엔 영혜의 매부 역시 처제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껴 다른 이로 촬영을 하려 한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에서는 포르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작품에 아무도 출연하려 하지 않고, 결국 그는 처음 깨달은 것처럼 자신이 출연한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 채식주의자 中



어린아이에게만 있다는 몽고반점이 영혜에게 있다는 것. 남녀의 성적인 결합은 원초적이고 은밀한 것이지만, 그 본질은 번식을 위한 것이라는 것. 남녀를 꽃으로 묘사했다는 것.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배제한 영혜가 꽃에 반응한다는 것. 영혜의 매부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보는 것, 이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다는 것.


한강 작가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거북하고, 난해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작가의 인터뷰를 본 후 어렴풋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는 순수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기 전으로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하고 모든 것에 열려있는 아름다운 존재다. 그런 어린아이의 상징인 몽고반점이 하필이면 영혜에게 있다.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몽고반점이 남아있는 영혜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혜의 꿈은 다른 존재를 죽이고 먹는 것을 서슴지 않는 인간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꿈을 꾸기 전까지 인간의 폭력성에 순응해 살아가던 영혜가 갑자기 그 폭력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영혜의 주변에는 언제나 폭력이 존재했다. 어렸을 적 수시로 자신을 때린 아버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은 성적인 신호가 아니면 이상한 것으로 보는 세상의 시선, 자신의 행동을 항상 타박하는 남편 등. 어느 순간 영혜는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육식을 거부한 영혜에게 돌아온 것은 폭력이었다. 세상은 영혜를 이상하게 보고, 가족은 영혜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때리고, 속이고, 달래고, 화를 낸다. 폭력을 거부하는 것으로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혜에게 남은 선택지는 나무, 즉 식물이 되는 것이었다.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 채식주의자 中



나무는 가만히 서서 땅을 받치고 서있기만 한다. 나무의 세계에는 폭력이 없다. 햇빛을 맞으며 묵묵하게 서있을 뿐이다. 점차 영혜는 육식이 아닌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물과 햇빛만을 찾는다. 세상의 폭력에서 벗어나 영혜는 나무가 되려 한다. 폭력을 가하지도, 받지도 않는. 가만히 서서 물과 햇빛만으로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그런 영혜가 꽃 그림에 욕망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꽃에도 성이 존재한다. 꽃도 번식하기 위해 서로의 꽃가루를 나눈다. 식물에게도 성관계는 원초적인 것이다. 영혜와 성관계를 맺을 상대방이 영혜의 매부인 것 역시 자연스럽다. 세상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만 매부와 처제라는 둘의 관계는 도덕적이지 않고, 인간의 관점에서는 폭력적이다. 세상의 폭력에 저항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좇은 영혜와 매부 역시 또 다른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영혜에게 보낸 세상의 시선이 마냥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 역시 아름다움을 좇았지만 결과는 폭력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세상은 아름다움과 폭력이 뒤섞였고 우리는 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다만, 알게 모르게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 채식주의자 中



소설은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상실한 영혜가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서 벗어나 대형병원으로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끝까지 영혜를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인혜가 도로변의 나무를 쏘아보면서...






그럼에도 우린 살아간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채식주의자> 속 인물들 역시 모두 견디고 있을 뿐이다. 영혜의 남편은 평판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세상의 폭력을 수긍한다.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을 위해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평범한 영혜에게 끌린 것도 영혜가 자신보다 잘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부유하고, 총명하고, 예쁜 여성은 그에게 불편한 존재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꾸미지 않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영혜에게 그는 타박만 할 뿐이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회사 임원과 사적인 자리에서 가족 모임을 갖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는다. 갑자기 변한 영혜는 그의 사회적 성공과 좋은 평판에 방해가 되는 존재일 뿐이고, 그는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영혜와 달리 세상을 견디고 살아가는 인혜의 모습에 성적인 감정을 느낀다.


영혜의 매부는 예술에 기대 세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자신의 예술의 성취를 위해 가족은 뒷전이다. 하지만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지낸다. 성과도 없고 인정도 받지 못하던 그에게 영혜는 그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영감을 준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그의 예술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끈다. 하지만 영혜와 달리 세상에 저항하지 않는 그는 어디선가 살아갈 것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채식주의자 中



인혜는 가면을 쓰고,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폭력을 견딘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인혜는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간다. 사회적으론 싹싹하고 생활력이 강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말을 줄이고, 그 상황은 회피한다. 그런 그녀는 기품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영혜의 일은 인혜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결국, 영혜처럼 인혜도 삶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아들의 존재는 인혜가 다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게 한다. 그래서일까 인혜는 그나마 영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결국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첫 번째 시다. 매일 뉴스에선 수많은 사건이 보도된다.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의 삶 속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어떤 무언가 지나가버렸을 수도 있다. 그것이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영혜나 인혜처럼 삶의 뒤바꿀 엄청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세상은 아름다움과 폭력이 뒤섞인 공간이지만,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 인간이기에 폭력보단 아름다움이 더 많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 채식주의자 中




작가의 이전글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실존주의 그리고 큐비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