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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Feb 26. 2022

임솔아 『최선의 삶』, 우린 모두 최선을 다했다

현대소설



임솔아 - 최선의 삶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인 최선의 삶은 임솔아 작가가 자신의 악몽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십 년 이상 같은 악몽을 꿨다는 임솔아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악몽을 풀어줬다"라고 표현한다. 오랜 기간 같은 악몽을 꾸고, 같은 악몽을 꾸는 것에 대해 질문하면서 작가 자신은 악몽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세상에 정답은 없다. 당연한 것도 없다. 밝기만 하지도 않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이 소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다.







같지만 다른 세 아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세상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방식도, 꿈꾸는 것도, 취향도 우리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또 같다. 감정이 있고, 삶의 끝은 죽음이다. 같음과 다름의 정도에 따라 친구가 되기도 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친구와 적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최선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같음과 다름의 정도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최선의 삶의 세 주인공 강이, 아람, 소영이 다니는 전민중학교에는 세 부류가 존재한다. 외부인, 외부인처럼 보이는 내부인 그리고 내부인. 경제력이 그 기준이다. 강이는 외부인이다. 가난한 동네인 읍내동에 살기 때문이다. 아람은 외부인처럼 보이는 내부인이다. 전민동에 살지만 가난하기 때문이다. 소영은 내부인이다. 전민동에 살고 부유하고 공부도 잘한다. 하지만 이 세 소녀는 친구가 된다. 저마다 가정에서 자신을 부정당한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강이는 자신을 모른다. 강이는 상류층으로 가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아바타일 뿐이다. 위장전입으로 전민중학교에 입학한 강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 읍내동에서는 잘 사는 아이로, 전민동에서는 가난한 아이로 통한다. 읍내동에서는 똑똑한 아이였지만, 전민동에서는 멍청한 아이가 됐다. 부모님은 강이를 사랑해 주지만 강이의 진심까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강이는 이도 저도 아닌, 언제나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다. 그런 강이에게 유일하게 소속감을 주는 집단은 아람이와 그 친구들이다.



나는 무엇도 아니었다. 되고 싶은 무언가를 분명하게 정해놓은 적도 없었다.
병신 같지 않은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무인 모텔의 누구나 같은,
그런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 최선의 삶 中



아람이는 사랑받지 못했다. 아람이는 엄마가 부재하다. 아빠는 아람이를 후레자식이라 부른다. 아람이에게 어떠한 응원도, 지원도 관심도 주지 않는다. 아람이가 잘못하면 아람이를 때린다. 집에 있으면 상처가 자란다는 아람은 집을 싫어하고 일탈을 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소영이는 꿈을 부정당했다. 소영이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지만 소영의 부모님은 소영이 전민중 영어교사가 되길 원한다. 소영이 원치 않은 공부를 시킨다. 소영 역시 공부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영화배우가 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의 꿈을 부정하는 부모님과의 갈등은 소영을 일탈로 이끌었다.


함께 일탈을 하던 세 소녀들은 세상의 폭력적인 관심과 무관심에 결국 집을 나가 서울로 간다. 가장 안정적이고 포근해야 할 집조차 소녀들에겐 폭력적이었다. 함께 거리로 나갔지만 목적은 달랐다. 강이와 아람은 자신의 존재를 잊기 위해, 소영은 자신을 찾기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힌 무인 정산기는 친절했다.
정산기는 우리를 반가워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인 모텔은 재떨이를 닮았다.
어디에나 있고, 아무나 쓰고, 아무나 더럽히고,
더럽혀도 다시 새것이 되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곳은 우리에게 집이 되어주었다.

- 최선의 삶 中






폭력의 형태는 다양하다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많은 폭력이었다. 때로는 친근하게, 때로는 뻔하게, 때로는 가학적으로 폭력이 소녀들에게 가해졌다. 처음에는 폭력을 이용하던 소녀들은 점차 길에서 나온 이유에 따라 서로 다르게 폭력에 적응한다. 강이는 폭력을 적당히 수용하고, 적당히 저항한다. 폭력이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 생각한 아람은 폭력을 수용한다. 폭력 속의 생활에서 자신을 잃을 것 같은 소영은 폭력에 저항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고 관리하면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둡기만 한 현실은 소영을 폭력적이게 만든다. 서서히 소녀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간 소녀들은 서로의 다름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가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강이와 아람에게 집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강이의 부모님은 여전히 강이를 사랑한다. 하지만 여전히 강이는 그들의 아바타다. 아람의 아빠는 아람의 머리를 자르고, 아람을 때린다. 세상 역시 강이와 아람에게 폭력적이다. 사람들은 강이와 아람에게 폭력적인 관심과 무관심을 던진다. 하지만 소영에게 집은 이제 다정하다. 소영의 부모님은 소영을 연기학원에 보내준다. 소영의 꿈을 지원해 주기 시작한다. 세상은 소영에게 다정하다. 학교에서도, 또래에서도 소영은 리더다. 최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던 강이와 아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만 최선의 결과를 원하던 소영은 꿈을 향해 나아간다.



병원은 적당하게 다정해.
베개 냄새도 은은하게 다정해.
모두에게 무심하게 다정해.

- 최선의 삶 中



소녀들 사이의 균열은 점차 커진다. 자신을 찾기 시작한 소영은 강이와 아람을 무시한다. 아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아이들을 무시하고 철저히 짓밟는다. 여전히 친구들이 전부인 강이는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 강이에게 돌아온 것은 소영의 폭력이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다 생각한 강이가 자신을 동정(?) 해서. 위태로웠던 소녀들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변한다. 강이는 아람과 다시 거리로 나간다. 하지만 자신을 잊기 위해 아람은 강이를 버린다. 혼자 남은 강이는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세상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소설은 강이가 소영의 목을 칼로 찌르고 끝이 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개인적인 존재이지만, 동물보다 약한 신체조건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런 인간이 만든 사회 역시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 모순이 현재의 세상을 만들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모순에 의문을 가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나의 충고가 상대에겐 오지랖일 수도, 나의 선한 관심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도, 나의 행복이 누군가에겐 불행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다만 나만이 아닌, 세상에도 다정할 수 있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 매일 뉴스에는 수많은 뉴스가 보도된다. 자살, 살인, 사기, 맹목적 비난 등. 나의 행동이 어떻게 평가받을지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결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만 다정한 행동은 높은 확률로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이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나쁘게 행동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그 사람에게 있는 걸까. 그 사회는, 그 시스템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 5천원을 들고 치킨집 앞을 서성이던 어린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을 제공한 한 치킨집 사장님의 미담이 뉴스에 보도됐다. 사장님의 작은 선행은 사회를 울렸고, 사회는 사장님의 선한 마음에 일명 "돈 쭐 내준다."는 행동으로 보답했다.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더 나빠지는 세상이 아닌,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다정해지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한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면서 글을 마친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 최선의 삶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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