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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Mar 01. 2022

홍은전 『그냥, 사람』, 우리가 외면한 세상의 이야기

에세이


홍은전 - 그냥, 사람



에세이에는 작가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나에겐 매일이 똑같은 일상을 특별하게 느끼는 작가들의 감성이 부럽기도 하면서 일상 속에서 느낀 감정과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쓰는 작가들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세이를 좋아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볼 수 있어서. 힐링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하지만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은 조금은 다른 에세이였다.


<그냥, 사람>은 장애인 야간학교인 노들야학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홍은전 작가가 한겨레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 만든 책이다. 인권운동가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아온 홍은전 작가의 삶을 그리고 있는 <그냥, 사람>은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동시에 머리가 띵해졌다. 세상은 아직 너무나 불합리했다. 모든 것은 경제적 논리와 강자의 '당연함'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강자의 '당연함'의 덕을 보고, 그 당연함에서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만 상대를 배려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벌리는 자'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손 잡아주는 자'의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펑펑 울었다.

- 그냥, 사람 中



홍은전 작가의 세상은 장애인, 세월호, 젠더, 아이 등의 인간의 문제에서 동물의 문제로까지 뻗어간다. 인간은 자신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나의 생각과 행동, 가치관은 모두 내가 살아온 세상 속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당연함'이란 말이 무섭고,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당연함이 모두의 당연함이 되진 않으니까.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은 것은 나의 당연함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더 많이 알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책, 영화, 그림, 음악과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은 다르다. 상상과 현실이 다르듯. 간접 경험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천천히 줄여줄 뿐이다. 상상 속의 나는 다양함을 존중하고,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평소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면 거부감과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홍은전 작가의 말처럼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독서인 것은 간접경험이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싶지만, 세상의 깊음까지는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 그냥, 사람 中



홍은전 작가의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한 것들 투성이었다. 노들야학도, 희망원도, 선감학원도. 다수의 사람들이 만든 '당연함' 속의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속의 세상은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의로 또는 타의로 나쁘게 행동한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은 있겠지만 결국 피해를 보는 사람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다.



제 속도를 고집하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욕먹기 십상이므로
사람들은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몰아붙인다.
더 이상 고통을 전가할 곳 없는 이들이 벼랑 끝에 매달려 있고
위로받지 못한 영혼들이 스스로 몸을 던진다. 

- 그냥, 사람 中



좋고 나쁨이란 무엇일까. 지극히 상대적인 이 가치를 정의할 수 있을까. 좋고 나쁨이 있더라도, 의도가 중요할까 결과가 중요할까.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는 나쁜 것일까, 나쁜 의도와 좋은 결과는 좋은 것일까. 완벽하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이 모여 만들어진 완벽하지 않은 사회에서 함부로 이를 정의할 수 있을까.


홍은전 작가는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는 명제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만든 시설에서 통제를 위해,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장애인을 때리는 것, 어린이집 또는 집안에서 훈육을 위해 아이를 때리는 것. 모두 의도는 좋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않다. 최근 주목받은 아동학대 문제로 부모의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법안‧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장애인 복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홍은전 작가가 이야기하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 달쯤 전 장애인 단체에서 지하철 승하차를 반복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시위는 끝이 났다. 아동 문제는 속전속결로 해결됐지만, 장애인 문제는 왜 그렇지 못할까. 더 큰 문제가 발생해야 해결될까. 큰 사건 이후 사회적 관심이 생기면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일을 왜 지금은 해결하지 못할까.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못한 나도 방관자는 아닐까.



다시 말해 '좋은 사람'이 운영하면,
그래서 '좋은 시설'이 되면 거주인의 인권이 보장될 거라는
이런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한가.
희망원은 이 질문을 매우 상징적으로 던지고 있다. 

- 그냥, 사람 中



내가 사는 세상은 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이 세상 속의 나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얻게 되는 것들이 많다. 이동하는 것, 먹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것을 포함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는 것까지. 일명 행복추구권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그 대상이지만, 실제 현실은 '평범함'이라는 단어로 무장한 다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적 약자의 세상은 다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이들의 세상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어려움을 '굳이'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가끔 사고가 났을 때 잠깐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그 잠깐의 관심을 준다는 것에서 우린 만족한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한 명이 나였다.


그 얄팍한 감정과 지식이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는 더 큰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보단 낫다고 스스로 위안했을 뿐이다. 홍은전 작가의 세상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부끄러웠다. 내가 모르는 세상은 내가 아는 세상만큼 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 단순한, 스스로를 위한 관심을 넘어 정말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없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다. 다름이 존중받는 사회,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고 구분짓지 않는 사회를 오늘도 꿈꾼다.



'시뻘게진 눈알' 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당신은 왜 모멸을 견디지 못했느냐고,
왜 '인간답게' 죽음을 무릅쓰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는 듯한 나의 질문들만 가득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 그냥, 사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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