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name Mar 02. 2022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너 나 그리고 우리

현대소설


한강 - 작별하지 않는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 한강, 괜찮아 中 -


『소년이 온다』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그 한복판에 있었던 동호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4·3사건이 훨씬 지난, 2018년 소설가 경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경하는 한강 작가가 어느 정도 투영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5·18과 관련된 책을 2014년 5월에 출간한 것도, 그 이후 4·3사건에 대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이 2018년인 것도. 한강 작가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당시 광주 도민들의 아픔을 그린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4·3 사건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려던 주인공 경하가 그 아픔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한강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4·3사건과 사랑이란 감정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장을 덮었을 땐 한강 작가가 한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기계적으로 문제를 분석해 원인을 찾는다.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처와 보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는, 문제가 해결됐음에도 찝찝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기계와 달리 우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내면의 상처는 아직 치료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 아닌,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과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작가가 말하는 사랑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 작가의 말 中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소설은 경하의 꿈으로 시작한다. 눈 내리는 벌판, 마치 묘비 같은 검은 나무들 그리고 경하의 발아래로 차오르는 밀물. 경하가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5·18과 관련된 책을 낸 후다. 경하에겐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5·18과 관련된 책을 낸 것 역시 학살에 대한 꿈을 잊기 위해서였으니까.


경하는 5·18 광주의 학살과 고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한 후부터 당시의 상황인 것 같은 악몽을 꿨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하가 택한 방법은 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그 흔적들을 여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작업을 이어나갈수록, 악몽과 환각은 심해졌지만 경하는 마침내 책을 완성한다. 그때 새로운 악몽이 경하를 찾아왔다. 경하는 직감적으로 그 꿈이 새로운 도시의 학살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경하가 찾은 사람은 인선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영화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치매 할머니의 일상을 다룬 단편영화 등을 만든 인선과 함께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마침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목공일을 하고 있었고, 꿈에 나온 나무를 직접 만들어 두겠다 한다.


하지만 그 뒤로 몇 해 동안 서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계획은 연기됐다. 삶의 문턱을 넘나드는 시간을 보내던 경하의 주변엔 가족도 직장도 삶에 대한 욕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경하는 기적처럼 살아났지만, 앞으로의 삶을 위해 그 꿈과 작별하기로 마음먹는다. 꿈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신이 그 꿈을 잘못 해석했다며 애써 외면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 뻔뻔스럽게 -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작별하지 않는다 中



그러던 어느 겨울, 경하는 목공일을 하던 중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입원한 인선의 연락을 받는다. 병원을 찾은 경하에게 인선은 제주도 자신의 작업실에 가 새를 구해달라 한다. 폭설과 강풍이 오는 중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인선은 오늘 안으로 가야만 한다며 막무가내로 경하를 제주도로 보낸다. 이때부터 소설은 4·3사건 당시 제주도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빠르게 전개된다.


폭설과 강풍을 뚫고 인선의 작업실을 찾는 경하의 모습은 4·3사건 당시 학살을 피해 산을 타고, 동굴로 숨는 제주도민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밖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 것 같지만 이들에게 선택지는 한 곳이다. 경하는 인선의 작업실, 당시 제주도민들에겐 동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인선의 작업실은 단전돼 물이 나오지 않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경하를 기다리는 것은 죽은 새의 차가운 몸이었다. 이 상황 역시 당시의 제주도민들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 작별하지 않는다 中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업실에 도착한 경하는 앓다가 깊은 잠에 빠진다. 하루를 꼬박 자고, 날이 어두워진 후 잠에서 깬 경하는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과 이미 죽어서 묻어준 새의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밤, 4·3사건 당시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과 그 한복판에 있던 인선의 가족사를 알게 된다. 부모와 동생을 잃고, 오빠의 생사마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언니와 남은 인선의 어머니와 온 가족을 잃고 15년간 수감생활을 한 인선의 아버지의 이야기. 학살을 피해 추운 겨울 산을 타고, 굶주림을 견디던 이야기.


치매를 앓아 인선을 알아보지 못하던 인선의 어머니가 낯선 사람만 오면 정신이 멀쩡해지는 이유는 4·3사건 당시 가족을 잃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선의 어머니는 인선에게서 학살 당시 잃었던 가족을 떠올렸고,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한이 낯선 사람 앞에선 정신이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고통과 사랑은 인선의 삶에 스며들었고, 인선은 영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경하의 말에도 나무를 심으며 영상을 만들 준비를 한 것이었다.



<1부> 새의 첫 장 결정(結晶)의 사전적 정의는 2가지다.


1. 원자, 이온, 분자 따위가 규칙적으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되고, 외형도 대칭 관계에 있는 몇 개의 평면으로 둘러싸여 규칙 바른 형체를 이룸. 또는 그런 물질.

2. 애써 노력하여 보람 있는 결과를 이루는 것이나 그 결과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즉, <1부>는 꿈을 외면하며 학살의 이야기를 회피하던 경하가 '새'를 구하기 위해 인선의 작업실로 가는 과정에서 만난 '눈'의 결정(結晶)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그 눈을 헤치고 인선의 작업실에 도착한 경하의 노력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2부> '밤'의 시간 동안 학살의 이야기에 직면한 경하가 <3부> '불꽃'에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순간 인선이 병상에서 눈을 뜨는 것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 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 작별하지 않는다 中



고통이란 감정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것은 말 그대로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만약 그 고통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삶이라면 우린 쉽게 회피하려 할 것이다. 내 삶이 어두워지는 것이 무섭거나 싫어서. 혹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 해결책만 제시하면 될 것 같아서 일 수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지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침묵과 비난은 누구에게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 경하가 인선과 하고자 했던 프로젝트 이름이다. 무엇과 작별하지 않는 것일까.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작별 인사만 하지 않는 것일지, 정말 작별하지 않는 것일지, 작별이 완성되지 않는 것일지, 기한 없이 작별을 미루는 것일지.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과 비난이 아닌 고통에 공감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뿐일 테니까. 물론 걸인을 도와 재난에서 피했지만 뒤를 돌아봐 돌이 된 여인의 전설처럼 고통에서 벗어나고, 직면한 고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언젠가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인선의 말처럼 허물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무엇이 지금 우릴 보고 있나, 나는 생각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는 누가 있나.

아니, 침묵하는 나무들뿐이다. 이 기슭에 우리를 밀봉하려는 눈뿐이다. 

- 작별하지 않는다 中




작가의 이전글 홍은전 『그냥, 사람』, 우리가 외면한 세상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