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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Oct 28. 2022

미야노마키노·이소노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인문‧철학



운명은 믿지 않지만, 인연은 믿는다. 둘의 차이가 뭔지 명확하게 설명해 보라 한다면,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도 종종 헷갈린다. 그럼에도 정리해본다면, 운명은 개인적이지만 인연은 사회적이다. 이소노 마호와 미야노 마키노씨의 말처럼 우린 세상에서 그저 하나의 작은 점일 뿐이다. 그 점이 어디에 어떻게 찍힐지는 지극히 개인적이다.(운명) '그게 네 운명이야.'란 말처럼 내 삶이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면. 내 고민도, 내 삶에 영향을 준 결정적 사건들도 모두 정해져 있다면... 슬플 것 같다... 트루먼 쇼인가...? 하지만 점과 점이 만나는 건 사회적이다.(인연) 너무 잘 맞는다 느껴도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별로여도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저 만남의 순간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때론 점선, 때론 직선, 때론 선분이 되겠지.






표지에 적혀있듯,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죽음을 앞둔 철학자(미야노 마키노)와 의료인류학자(이소노 마호)가 나눈 말들을 담은 책이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두 사람은 총 스무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운명과 필연, 불운과 불행, 죽음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에게 유일한 운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길을 걷다가, 음식을 먹다가, 집에서 쉬다가. 우린 언제든 죽을 수 있지만, 누구도 죽음을 예상하며 살지 않는다. 책에서 인용되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에게 죽음은 '분명히 다가오지만 지금은 아닌' 것일 뿐이다. 즉, 삶과 죽음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음에도 우린 매 순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 우리의 삶이 힘들어질 땐, 확률이 개입되는 순간부터다.



'암이 낫는다.'와 '암이 낫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고,
그 간극 속에는 갖가지 삶의 방식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만 검사를 받는 환자는 '암이 나은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검사를 앞두고 품는 '혹시 낫지 않았으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은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p. 48



- '그 식당 핫플이야. 지금 가면 줄이 길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린 줄이 없길 바라며 식당으로 뛰어간다. 그리고 긴 줄을 보곤 낙심한다. 


- '오늘 시험 망친 것 같아. 분명 떨어질 거야...'

하지만 우린 발표날이 되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한다. 그리고 슬퍼한다.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따라붙는 '약한 운명론'의 상황들은 때론 기대감으로, 때론 불안감으로 우리의 피를 말린다. 이처럼 어찌 보면 가벼운, 별거 아닌 가능성들조차 우릴 힘들게 하는데... 죽음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마키노씨는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죽음이 올지도 모른다'가 아닌 '죽음이 온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의사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누구라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 복싱을 시작했어?"라고 물어보면 그럴듯하게 답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렇게 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같을 때도 있다.
잘 모르겠지만, 그때 그때 나에게 온 만남과 말, 기회 등에 몸을 싣다 보니
어느새 지금 이 자리에 있다. 

p. 62



(약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 두 사람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선택'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지니까. 우린 그저 '선택'을 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하니까. 마키노씨 역시 선택의 순간에 놓였다. '병세가 악화될 것'을 두려워하며 병원에서만 지낼 것인가, 그럼에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것인가. 마키노씨의 선택은 후자였다.


선택의 기준은 바로 '합리성'이다.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한 후,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한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선택이란 무엇일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나의 어떤 선택이 단적으로, 제3자의 입장으로, 겉으로 보기엔 비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선택은 나에겐 합리적인 선택이지 않을까.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지를 고르는 밸런스 게임처럼 말이다.


나만의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단순히 '어떤 일을 하고 싶다'처럼 단기적인 가치가 아닌, 궁극적으로 살고 싶은 삶의 방향과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가끔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언가에 끌릴 때가 있다. '운'이 좋다면 그 끌림의 끝엔 원하는 삶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운을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마냥 그 끌림을 좇았지만 갑자기 끌림이 사라진다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약한 운명론'처럼 그 끌림이 주는 확률 게임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끌림의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나의 선택지는 더 많아지지 않을까.



사람은 어떤 때에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운명을 발견해내는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그저 멍하니 사는 걸 뜻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운명 속에서 어떻게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는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만남과 죽음, 상실의 우연이 운명 속에 존재하게 될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p. 245



그럼에도 우리 삶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운과 우연이라 말하는 일들 말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저자들은 '요술'로 지칭한다. 그런 일들은 내가 겪어야만 했던 '운명'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요술'이 작용한 것일 뿐이다.


운명이 요술이 될 때, 우리의 삶은 더 무궁무진해진다. 전자라면 우리 삶은 이미 정해진 선이 있고, 모든 사건들은 그저 그 선을 만든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요술이라면,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개별적인 점이고 그 점을 어떻게 이어 선을 만들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된다.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겪었을 때 당신은 '불행'하다 생각할 것인가, '불운'하다 생각할 것인가.



미래를 바라보며 타인과 함께 무언가 생성해내려는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인간이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선을 그려낼 수 있구나. p. 217



물론 요술이 나에게 오는 '타이밍'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오는가도 중요하니까. 기회도 준비된 사람만이 잡고, 운도 실력이란 말이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요술과 우연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 시간과 장소에 있어야만 나타난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가치를 좇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다.


누군가와의 인연을 점선, 선분, 직선 중 무엇으로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다. 내가 나중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결정하고 있는 것도 역시 나다. 단순히 내 삶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따라 흘러갈 뿐이라 생각하거나, '약한 운명론'의 확률에 지쳐선 안된다.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이 만들 아름다운 선을 만들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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