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음성 줍기
주워 담는 그 사람은 바로 속기사, 또 다른 이름은 문자통역사
by
한꼼꼼
Jan 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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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자
가 오시는 줄 알았는데, 누가 친히 래퍼를 모셨을까.'
두서없이 빠르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슈팅스타가 의인화된다면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곧 주제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예측 불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성과공유회 발표 자리에서 이런 고백을 한 대표님도 계셨다.
'제가 사실 ADHD가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그럴 수 있겠다.
속으로는 내심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가 되는 듯싶다만.
이내 슈팅스타 같은 말들을 들으면서 머릿속의 문장들이 꼬인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버린다.
그리고 내 평평했던 미간도 꽝꽝 뭉쳐서 방지턱이 생
긴다.
'오늘은 소낙비를 맞는 날이구나.'
감사하게도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궁금점이 생길 수 있다.
머릿속에도 안 들어오는 말들은 그냥 한 귀로 흘려버리면 되지, 왜 고통스럽게 주워 담는다고 할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내 직업은 속기사다.
또는 문자통역사라고 불리운다.
문자 그대로 말을 듣고 적는 사람.
문자를 통역하는 사람, 농난청인을 대상으로 상황에 대한 묘사를 글로 적고 발화자의 말을 전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속도와 정확성이 첫째인 직업이라, 쏟아지는 말들을 빠르게 캐치해서 듣고 순발력 있게 적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말이 우박을 동반한 소낙비라면!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습되지 않는 머릿속을 따라 온몸으로도 느껴버린 건지.
한겨울에도 등에 식은땀이 흘러서 순식간에 몸이 후끈해지고, 이내 광대 쪽이 뜨거워지면서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든다.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음을 알 수 있다.
부끄럽다.
말을 놓치게 되면, 나는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창피해진다.
매 순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와의 싸움을 초 단위로 치열하게 다투는 셈이다.
'방금 뭐라고 했지?'
속기사도 사람인지라 100% 제 속도를 따라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상황에 따른 예시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쉬는 시간을 갖지 않고 장시간 발화할 경우, 피로가 누적되어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의 경우다.
두 번째는 발화자가 말을 자주 번복하며 더듬을 경우, 머릿속에 음성 인식이 바로 되지 않고 나도 같이 버벅거리게 된다.
세 번째는 당연한 말이지만 발화자가 스피킹을 매우 빠르게 할 경우.
이런 경우 사실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해리포터 투명 망토에 둘러싸인 채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이지만 늘 속으로 진돗개 3호 발령을 외치곤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서 해결해야 할까.
비유를 하자면, 필자는 미취학 아동 시절 껌을 씹다가 손으로 잡고 길게 늘려본 경험이 있다.
모차렐라 치즈라면 따뜻한 상태여도 늘리다가 중간에 끊어질 수도 있는데,
반대로 껌은 쉽사리 끊어지기 쉽지 않다는 사실!
만약 발화자는 말하며 뛰어가는 껌이고, 나는 끊어지지 않기 위해 따라가는 껌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문장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으며 기억 저편 멀리 희미해져 가는 말들을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낚아채서 적어낸다.
그렇게 기억의 잔상을 따라가다 보면 발화자가 한숨 고르며 슬슬 문장을 마무리 지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도 같이 숨을 몰아쉬며 뻐근한 손목을 크게 돌려준다.
발화자와 속기사의 거리 간격을 줄이고 하마터면 끊길 뻔했던 껌을 탄력 있게 붙이는 순간.
소낙비같이 쏟아지는 음성들을 무사히 주워 담
으
며
다음 문장은
은은하고 따뜻한 볕이 쬐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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