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AI 시대, 코딩 대신 장사를 시작했다

AI가 우리 일을 가져가고, 우리는 장사를 찾기 시작했다.

by 꼼마

어느 날 밤, Claude Opus한테 코드 리팩토링을 시켰다.

오래된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작업이었다. 얽혀 있는 걸 풀고, 구조를 새로 잡고, 검증까지 다시 해야 해서. 우리 추산으로 3일. 회의 때 "이건 꽤 큰 건이죠"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3일 걸렸다. 야근은 안 했지만 점심도 대충 먹으면서 집중해서 꼬박 3일.


그걸 Claude한테 컨텍스트 넣고 "이 구조로 리팩토링해줘"라고 했더니 3분 만에 나왔다.

처음엔 신기했다. 와, 이거 진짜 되네? 동료 불러서 보여주고, 코드 리뷰하듯 한 줄씩 읽었다. 구조도 깔끔하고, 네이밍 센스가 우리보다 나은 부분도 있었다. 몇 군데 손볼 데가 있긴 했지만 뼈대는 그대로 쓸 수 있는 수준. 신기하다를 넘어서 편해졌다. 반복적인 건 맡기고 우리는 큰 그림만 그리면 되겠구나. 생산성 2배가 아니라 5배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근데 어느 순간 그 감정이 바뀌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퇴근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샤워하다가였을 수도 있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거다.


내가 3일 걸린 걸 3분 만에 해냈으면, 나는 뭐지? 지금이야 프롬프트를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좀 웃기지 않나.


"엑셀 잘하는 사람" 같은 취급을 받을 날이 올 것 같은. 10년 동안 쌓은 게 한순간에 구식이 되는 그 감각.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아직은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썼는데, 그 "아직은"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그게 언제까지인데.


팀원들이 있을 때 이 얘기를 꺼냈고, 다행히 "에이 설마" 같은 반응은 없었다. 다들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던 거다. 일할 때 "이건 내가 만들었어"가 아니라 "이건 AI가 만든 건데 내가 좀 고쳤어"가 자연스러워진 시점에서, 우리의 가치가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거.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코드만 짜는 사람이면 진짜 위험한데, 코드 말고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그날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졌다.


처음엔 그냥 "개발자 부업"으로 검색했다. 프리랜서, 외주, 강의 만들기. 근데 이것들은 다 코딩의 연장선이었다. 코딩 자체의 가치가 흔들리는데 코딩으로 뭔가를 한다? 아닌 것 같았다.


주식이 잠깐 스쳤다. 유튜브 썸네일에 "월 500만 원 수익 인증"이 찍혀 있으면 일단 클릭은 하게 되니까. 근데 잃을 돈이 없었다. 회사에 모아둔 돈이 적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리스크 테이킹에 쓸 여유 자금이 없었다. 접었다. 부동산은 5분 고민했다. 5분이면 충분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도 생각해 봤다. 개발 브이로그 같은 거. 근데 얼굴을 까야한다. 실수하면 되돌리면 되는 세상에서 살다가, 인터넷에 올라간 얼굴은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게.. Ctrl+Z가 안 먹는 세계. 패스.


온라인 서비스는 좀 더 오래 고민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 중에 시장이 있는 거. 근데 1인 창업자 커뮤니티를 뒤져보니 온라인 서비스의 거의 90%가 3개월 안에 사망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성공 사례도 있지만 그건 생존자 편향이고. 게다가 AI가 온라인 서비스를 만드는 시대에 온라인 서비스로 경쟁한다? 뭔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 아니다. 비유가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랬다.


한 2주 정도를 이러고 있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코드 짜고, 밤에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대로 이것저것 보고. 그러다 어떤 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직장인 부업으로 월 300, 온라인 리셀러 현실"

image.png 구글에서 '직장인 부업'을 검색하면 나오는 화면



리셀러. 떼다 파는 거.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좀 얕봤다. 쿠팡에서 싸게 사서 네이버에서 비싸게 파는 그런 거 아닌가? 근데 영상을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찾아서 그 사이에서 마진을 먹는 구조. 양쪽을 연결하고, 중간에서 가치를 더하고, 마진을 남긴다. 생각보다 단순한데 그래서 더 끌렸다.


근데 국내는 레드오션이었다. 쿠팡 로켓배송이 거의 모든 카테고리를 먹어버린 상태에서, 개인 셀러가 낄 틈이 별로 없어 보였다. 마진이 있으려면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하는데.


그러다 "역직구"라는 단어를 만났다.



역직구

한국 상품을 해외에 파는 거. 직구의 반대. 해외 소비자가 한국 상품을 살 때 우리가 중간에서 소싱해서 보내주는 구조.

이거는 좀 달랐다. 일단 경쟁이 국내보다 적다. 한국어+일본어(또는 영어)+물류+CS를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진입장벽이 있고, 그 진입장벽이 곧 해자가 된다.


플랫폼을 찾아봤다. 아마존 재팬, 라쿠텐, 큐텐 재팬, 쇼피. 이 중에서 큐텐 재팬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큐텐에서 "시카크림"을 검색했더니 같은 상품을 파는 셀러가 수십 명이었다.

image.png 큐텐에서 '시카크림'을 검색하면 나오는 화면


보통은 "경쟁자가 많네, 안 되겠다"라고 생각할 텐데, 우리는 개발자라서 다르게 읽었다.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가 47개. 그건 그만큼 손님이 있다는 뜻이다. 47개 가게가 다 먹고살 만큼 사람이 몰리면 수요가 검증된 시장이라는 얘기. 한 명이 독점하고 있으면 오히려 무섭다. 누가 그 해자를 허물지 모르니까.


근데 47명이 나눠 먹고 있으면, 그중에 좀 더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K-뷰티가 일본에서 얼마나 핫한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큐텐 재팬의 메가와리(メガ割) 세일 때 K-뷰티가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일본 유튜버들이 올리브영 하울 브이로그를 찍는 게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것도 알았다. 마츠모토키요시에서 한국 선크림을 진열대 한 줄 빼서 따로 배치해 둔 사진도 봤다. 시장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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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이미 K 화장품이 인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일의 구조가 우리한테 익숙했다. 소싱 - 상품 등록 - 판매 - 주문 처리 - 발송. 단계가 명확하고 각 단계가 반복적이다. 반복적이라는 건 자동화할 수 있다는 뜻이고. 개발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물건은 사야 한다. 선크림을 AI가 대신 발라주진 않는다. 물리적 상품의 유통은 디지털 서비스보다 AI에 대체될 가능성이 낮다. 동시에 커머스에는 반복 작업이 엄청 많다. 상품 등록, 가격 조정, 재고 관리, CS 응대. 전부 자동화 대상이다. 우리가 잘하는 것. 아니, 우리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자동화잖아.



"커머스 자체를 하면서, 동시에 커머스를 자동화하는 도구를 만들자."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정돈된 문장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야 그러면 크롤러 돌려서 가격 비교하고 자동으로 올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일본어 누가 해" "번역 API 쓰면 되지" "근데 우리 커머스 1도 모르잖아" 이런 대화가 새벽 2시에 슬랙에서 오간 거다.


커머스 지식이 완전히 제로였다. 매출? 마진율? 물류? 통관? 전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 것들. 스타트업에서 "우리 도메인 이해가 부족해서"라고 말할 때 그 도메인이 우리한테는 커머스 전체였다. (좀 웃기긴 하다)


근데 뭐, 생각해 보면 우리도 처음 코딩 배울 때 for문이 뭔지 몰랐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된다. 문제는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인데, 리셀러의 좋은 점은 초기 투자가 적다는 거였다. 재고를 잔뜩 쌓아놓는 게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소싱해서 보내는 구조도 가능하다고 했다. 무재고. 일단 작게 시작해 보고 되는지 확인하는 것과 같은 논리.



큐텐 재팬에서 팔기로 했다.

셀러 가입을 신청했다. 큐텐 QSM(Qoo10 Seller Management)이라는 셀러센터에 들어가서 가입 폼을 채우기 시작했는데, 일본어였다. 당연히 일본어지. 일본 마켓플레이스니까. 구글 번역기를 옆에 띄워놓고 한 필드씩 채워나갔다. 사업자등록번호, 통신판매업 신고번호, 대표자명, 판매 카테고리... 정부 24에서 서류 떼고, 영문 사업자등록증 발급받고. 폼 하나 제출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리고 심사.

2주 걸린다고 했다. 서류는 냈는데 승인이 안 나서 발이 묶인 상태. 시험 답안지는 냈는데 채점 결과가 안 나오는 그 느낌. 메일함을 하루에 세 번씩 확인했다. 아무것도 안 왔다.


그 2주가 길었다.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유튜브에서 큐텐 셀러 관련 영상을 닥치는 대로 봤다. 상품 등록 방법, 메가와리 참여 방법, 배송비 설정, CS 대응. 엑셀에 경쟁 셀러들을 정리했다. 이 셀러는 시카크림 위주, 이 셀러는 선크림 특화, 저 셀러는 올리브영 인기템 종합. 가격도 비교했다. 올리브영에서 12,000원짜리가 큐텐에서 1,980엔에 팔리고 있으면 환율 계산하고 수수료 빼고 배송비 빼면 마진이 얼마인지. 스프레드시트의 셀들이 하나씩 채워졌다. (시험공부할 때 범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image.png 우리가 처음에 이용했던 큐텐 엑셀


솔직히 불안했다. 이게 되는 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지. 개발은 10년 했으니까 대충 감이라도 있지, 커머스는 진짜 감이 하나도 없었다. 배송이 분실되면? 클레임이 들어오면? 일본어로 CS를 해야 하면? 통관에서 걸리면?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모르는 걸 모르는 것까지 합치면... 끝이 없었다.


근데 재밌는 건, 그 불안감이 싫지만은 않았다는 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느끼는 그 두근거림이랑 비슷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는 그 감각. 신입 때 처음으로 중요한 일을 맡아서 손이 떨리던 것. 오랜만이었다. 개발로는 더 이상 그런 떨림을 못 느끼게 된 지 꽤 됐는데.



2주 하고 3일째 되는 날, 메일이 왔다.

"셀러 등록이 승인되었습니다."

QSM에 로그인했다. 왼쪽 메뉴가 쭉 늘어서 있었다. 상품관리, 주문관리, 정산관리, 프로모션, 광고, 고객문의, 배송설정, 정산내역... 세어봤다. 43개. 아는 메뉴가 0개.


로그인은 됐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 열쇠는 받았는데 안내판이 없는 건물에 들어간 기분. 문마다 번호는 쓰여 있는데 어떤 방이 뭔지 모르는.


한 명이 슬랙에 QSM 스크린샷을 올렸다. "이거 보고 있으면 뭔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뭘 눌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한 명이 답했다. "일단 상품 계속 올려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image.png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QSM에 번역기능이 있다는 걸 한참 나중에 알았다.


맞다. 첫 발자국부터.

우리는 셀러가 됐다. 아직 상품 하나도 못 판, 매출 0원의 셀러. 근데 뭐, 셀러는 셀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