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음악대, 이 위대한 유산

내 큰아버지 김성도를 추억함

by 초린혜원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낡은 흔들의자가 떠오른다.

한눈에 봐도 너무 낡아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의자는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거덕, 삐거덕 관절이 엇박자로 꺾이는 소리를 냈다.


어린 내게는 기골이 장대한 그의 체구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보다그 흔들의자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고 깊게 ,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지금부터 나는 흔들의자의 삐거덕 거리는

소리를 지나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흔들리고

오래된 책들의 매캐한 냄새가 온 방을 채우고 있던 그의 서재로 나의 큰 아버지, 어진 길 김성도 선생을 만나러 간다.



그는 '따따따! 따따따! 주먹 손으로'라는

첫 소절만 들어도대한민국 5세 이상이면 누구나 다~ 아는 동요 '어린 음악대'를 만든 사람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작사와 작곡 모두를

혼자 거뜬히 해낸 사람이며(물론 이외에도 여러 곡을) 안데르센 동화를 대한민국 최초로 번역해

소개한 사람, 그리고 다수의 동화책을

지은 저자로,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어린 음악대' 노래비까지 서 있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평생을 작가로 살아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문장 하나,탄생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한 데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진짜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단한 사람이

내 큰 아버지라는 사실은 한동안 내게 너무 큰 벽으로 작용했다. 대문호는 아닐지라도 세대를 넘어 누구나 다 아는 국민동요를 탄생시킨 동화작가의 그늘은 내게 성공과 안위를 보장하는 든든한 뒷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언젠가는 한 번쯤 온 힘을 다해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 경기의 허들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내 기억으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배를 드리러 갔던 일곱 살 무렵이었던 거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기 싫다고 떼를 쓰고 울면서 따라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겐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매우 희미하다.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면 자폐를 의심받을 정도의 소심함과 사회성 부족으로 해서 다소 불우했던 시절이었으므로,사춘기가 지나 비로소 말문이 트이고 자의 반, 타의 반 많은 활동들을 하면서 그 시절의 자그마한 아이였던 나를 선택적 기억으로 지워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의 손을 잡고 큰 아버지 집으로 갔던 길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리 행복한 기억이 아니다. 이놈의 김 씨 집안은 다들 뭐가 그리 과묵한지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혈통에 고독이 새겨진 집안보다 더한, 침묵이 혈통에 대대로 새겨져 있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은 여자아이가

침묵이 벽지처럼 사방을 두르고 있는 그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곱 살 설날 그 또렷하고도 명징한 기억 속, 내가 만났던 큰 아버지는 여전히 말수는 적었지만, 한 마디의 말로 나를 사로잡아버리는 놀라운 마술을 펼치셨던 것이다.



"네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지?"


'큰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계시지?"



선뜻, '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머뭇머뭇하는 사이, 아버지가 예의 무거운 입을 열고는 한 마디 툭, 던지셨다.


"형님, 어무래도 야가, 형님 뒤를 이을라 카나 봅니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짧고도 강렬한 대화는 큰 어머니가 수정과와 강정을 내오면서 허무하게 끝이 나 버렸지만, 나는 일곱 살 설날 큰 아버지의 눈에 한가득 들어 있던 내 예쁜 형상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렇게 시작됐다. 큰 아버지 집에 산처럼 쌓여있던 동화책들과 새 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귀한 잡지들이 우리 집으로 이동을 하게 되기 시작한 것은.


이가 딱딱 맞부딪힐 정도로 추웠던 겨울

내가 큰 아버지 뒤를 이을 거라 내심 기대하던

우리 아버지가 술병으로 돌아가시자, 나는

그나마 간간이 했던 세상과의 소통을 닫아버리고

오로지 책 읽는데만 몰두했다.


한옥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큰 아버지가 보내온 책들을 읽으며 슬프고 우울한 감정들을 오롯이 책과의 대화로 풀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독서량이었다. 친구들이 가끔 묻고는 한다.



"넌, 언제부터 그렇게 책을 좋아했니?"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은 지금과 달리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겨우 한글을 배웠지만, 나는 깨인 부모 덕분에 한글을 빨리 익혔고, 이렇게 문화적인 집안 배경 때문에 풍성한 책의 숲에 일찍부터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한 없이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지만 아버지가 일곱 살 설날, 큰아버지 댁에서 했던 그 한마디가 내겐 유언처럼 남아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다.


그런 탓일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큰 아버지를 찾아뵙지 않았다. 학교 문예반을 이끌고, 국어 선생님께 글솜씨를 칭찬받고, 시 경연 대회를 나가면 제법 상도 타서 우쭐하게 자랑할 만도 했지만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을볕이 쏟아져 발끝부터 물들이던,앞산 자락에서 열린 시 경연대회로 기억한다. 나는 종전처럼 학교 대표로 대회에 출전했고 거기서 심사위원으로 자리한

큰 아버지를 수년만에 다시 뵙게 된 것이다.


끄러웠고, 미안했고, 그래서 더더욱 숨고 싶었다. 그런데, 큰 아버지는 한달음에 성큼성큼 걸어오시더니 음료수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시 잘 지어라" 하고는등을 돌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시는 거였다.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그걸로 된 것이었다.


큰아버지가 유명한 아동문학가라서 내게

시와 문장에 관한 어떠한 가르침을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거인이었지만 거창하거나 교만하지 않았고, 이미 위대했음에도 군림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조카가 책을 좋아하니, 책을 읽게 만들어 주셨고, 시를 쓴다고 하니. 잘 쓰라 본인의 방식으로 격려를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문학적 재능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게 물려주고 싶었던 걸까?


서른 명이 넘는 조카들 중 유일하게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들었다.깊고도 움푹하게 큰 내 눈이, 그래서 가끔은 외국인이라는 오해를 듣는 내 눈이 그의 눈을 꼭 닮았다고 엄마는 얘기하곤 했었고.


그런 연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참을 입원해 계셨을 때, 엄마는 나의 등을 떠밀어그의 병문안을 몇 번이고 가게 했다.

그리고 손을 잡고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라고 시켰다.


이미 병색이 깊어 텅~비고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도 , 왠지 내 손을 잡은 커다랗고 마른 그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마 "큰아버지 뒤를 이어 줄 거지?"라는 무언의 애원이자 둘만의 약속을 그 순간, 하신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병의 후유증으로 예의 그 흔들의자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는 시간들을 뒤로하고 영면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대형 금융기관의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해,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방송작가로 살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울고불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대신 회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방송 원고까지 쓰는 놀라운 슈퍼우먼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송작가란 타이틀은 결혼을 하고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기를 거치면서도 끈끈하게 나를 지탱해준 힘으로 20여 년을 같이 했다.


그리고 그 경험치가 쌓여 독립출판이긴 하나, 권의 책을 내게도 됐고, 틈틈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책을 사랑하며 읽는 인간으로도 살아가고 있다.

큰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만족하고 계실까? 아니면 아버지랑 두 분이 함께 '미욱한 놈'이라고 흉이라도 보고 계실까?


가끔 생각해본다. 큰 아버지 뒤를 이어

지금이라도 '동화를 써볼까?' 하고 말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서툴게 끄적거려도 보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내게는 그런 文才가 아직은 없음이다.


나이가 이만한데, 아직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너무 늦은 때라는 건 없다'는 금과옥조를 여전히 믿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잡설이라도 문장을 이어나가는 재주가 아주 조금은 있다는 것인데, 그나마도 이 재주의 8할은 내 큰아버지 성도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할 터이니 어쩔 것인가!


아이가 어릴 때 '어린 음악대'를 들려주며

'큰 할아버지의 존재'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아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자기도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감히 바란다. 큰 아버지의 이 위대한 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나로부터 시작돼 아이로 연결되고, 운이 좋다면 세상 속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를 말이다.


20세기에 탄생한 노래가 21세기에도 건재해 동심의 순수한 곳을 보드랍게 건드리는'어린 음악대' "따따따 나팔소리'처럼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기를 말이다. 그러니,


항상 처음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 해지는 '시작하는 힘', 그 힘을 믿고 그렇게 정진해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