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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Nov 22. 2022

시험이 끝나면 먹곤했던 바로 그 음식 , 막창

누군가에겐 다시없을 힐링푸드

음식 하나가 세상을 구원하진 못 해도,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행로 정도는 변경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짧지 않은 생의 길을 걸어오면서 여기저기에서 합당한 사례들을 목격했고 때론 별것도 아닌 음식 덕분에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런 이유로 한 때는 대체 '음식'의 어떤 요소가 이렇게 지대하게 한 사람의 생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해 본 적도 있었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으로서의 역할, 그 외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내재돼 있기에 그런가 싶어 말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음식 하나가 일으킨 사소하지만 확실했던 이런 '나비효과'에 관한 경험담이랄 수 있겠다.



대구를 고향으로 둔 사람임에도 , 어쩐 일인지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 대구 10미에 해당하는 음식,'막창'을 먹지 않았었다. 아니 먹지 않았다기보다는 멀리 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권유에 의해 몇 번 입에 넣었다가 사람들 몰래 슬쩍 뱉은 적도 있었으니. 한때는 막창 가게가 즐비했던 '오페라 하우스'   인근에 집을 두고 있고, 심지어는 타 지역 사람들도 다 알만큼 유명한 '막창거리' 바로 옆에 일터인 '방송국' 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익히 알려진 대로 대구사람들의 막창 사랑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대체 그 질깃질깃하고 징그럽게 생긴 걸 왜 먹느냐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되려 " 이 고소하고 맛있는 걸 왜 안 먹어요?"라는 반문을 하며 '막창 1인분 추가요!'를 외치는 대구 사람들이다. 오죽했으면 '고기의 부산물' 은 먹는 게 아니라는 자기만의 희한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남편조차 "그래도 막창은 좀 먹을만하잖아!'라는 얘기를 할 정도이니.


하지만 동글동글하게 잘라져 불판 위에 놓인 막창을 보고 있노라면 '식욕'을 느끼기도 전에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던 나는  방송국 동료들이  "작가님, 오늘 저녁에 막창에 소주 한 잔 어때요?"라는 제의를 할 때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어떤 핑곗거리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막창 집 둥근 의자에 앉아 막창을 구울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세례라도 받을라 치면, 한참 동안 그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참은 적도 있었다.


바싹하게 구워진 막창 한 점을 청양고추를 쏭쏭 썰어 넣은 '막장'에 찍어 잘도 먹는 동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먹성에 경외감이 들 정도였는데, 이렇게 막창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내게도 '막창'으로 인해 삶의 결이 달라지는 순간이 찾아왔으니 삶은 참 오묘한 길을 숨겨둔 '보물찾기' 같다.



내 인생에 '막창' 은 없을 거라던 다짐을 깬 건 아랫동서 덕분이었다. 결혼을 하면서 남편의 직장이 있는 낯선 곳에 이주해 정착하게 된 동서는 다른 건 다 몰라도 너무나 사랑했던 음식, '막창' 만큼은 포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 전체를 헤매고 헤매 봤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막창'을 파는 데가 한 군데도 없어 속이 이만저만 상한 것이 아니었다나.


"형님, 진짜 이상한 거 있죠? 어떻게 이 도시엔 막창을 파는 데가 한 군데도 없어요? 그 맛있는 걸 이 사람들은 왜 안 먹을까요?"


"글쎄.. 왜 그럴까? 내가 듣기로는 먹긴 먹어도 우리 대구사람만큼 좋아하진 않는가 봐. 그래서 가게도 잘 없을 거고"


"형님, 저 대구 가면 막창 좀 사 주세요. 아주 막창이 먹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라니까요!"


싹싹한 동서의 청을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아, 그러마고 약속을 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 약속을 지키기까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아마 어느 추석 전야이었을 거다. 추석 바로 전날이 '친정어머니 생신'이었던 동서는 음식 마련을 돕다가 저녁이면 항상 친정집으로 향하곤 했었는데, 그 해 추석엔 사정 상 시댁에 머무르기로 했던 것이다. 둘이서 후딱 할 일들을 다 해 치우고 나니 어라, 왠지 저녁 시간이 매우 여유로운 것이 아닌가. 아이들도 다 커서 우리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시점이었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기름 냄새를 맡은 터라 뭔가 신선한 수혈이 필요했음이다. 마침 동서랑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기도 했고. 이걸 엽렵한 동서가 놓칠 리 없었다.


"형님, 우리 막창 먹으러 가요! 시원한 맥주도요. 콜?"


"음... 그래.. 코.. 오... 올"

 


그렇게 나선 막창 투어였다. 추석 바로 전날이라 심하게 붐빈 것은 아니었지만 막창을 굽느라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를 사이에 두고 동서와 나눈 얘기들은 막창 집 빈자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고 따뜻하고 내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성격의 이면들이 막창 한 점과 거품이 환상적으로 올라온 맥 주 한잔에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형님, 막창 안 드신다고 했죠? 그런데 이렇게 저랑 나와 주시고 너무 감사해요. 근데요, 막창 이 맛있는 거를 왜 안 드세요? 제 말 믿고 막장에 찍어서 딱 한 점만 먹어보세요. 씹는 맛이 진짜 말로 표현을 다 못할 만큼 좋거든요."


그렇게 동서의 말에 마지못해  바싹하게 구워진 막창 한 점을 입에 넣어 눈을 질끈 감은 채 씹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입으로 들어온 막창은 내 예측을 뛰어넘는 맛을 지니고 있었음이다. 질길 것이라 믿었던 막창은 그리 질기지 않았고 씹을 때마다 고소한 육즙이 혀에 닿으면서 감겼다. 실로 술을 부르는 맛이라고나 할까.


 "형님, 아이 가졌을 때 진짜 막창 생각이 나서 울 뻔했다니까요? 저 위쪽으로는 막창을 파는 데도 잘 없지.. 그렇다고 무거운 몸을 해 가지고 대구까지 기차 타고 내려오자니 그렇고, 막창을 배달받아서 집에서 구우면 또 이 맛이 안 나니까.. 형님 저 오늘 맘껏 먹어도 되죠?"


막창 선수인 동서가 기가 막히게 구워주는 막창을 이후로도 몇 점 더 먹어보면서 '이만하면 먹을만한 걸?' 이란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렇게 내 인생 첫 막창은 그 어느 추석전야에 동서와 나눴던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다. 또한 그 이전에도 좋은 사이였지만 막창집 회동 이후, 동서를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떠나 조금 더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허물이 없어졌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서 덕으로 막창에 입문을 하고 나니, 막창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막창을 좋아하는 이들이 마련하는 회식자리도 마다하지 않게 됐고 막창을 대할 때면 소름이 돋곤 하던 증상도 줄어들게 됐는데, 이후 또 한 번 막창으로 인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됐으니 이만하면 '막창' 에게 고맙다는 느낌을 가져야 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우리 집에선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었다. 워낙에도 '목표지향적'인 데다, 욕심이 많았던 아이는 입학하기 전 겨울방학부터 '지역균형 선발'이라는 난제를 자신의 학업목표로 삼았던 터였다. '지역균형 선발' 학교장 추천을 받으려면 해당 학년에서 전교 1등을 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중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3학년 때부터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말이 쉽지, 여러 학교로부터 모여드는 아이들 안에서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차마 드러낼 수는 없는 법, 그저 아이의 자기 주도적 학습역량을 믿고 묵묵히 지지하는 것만이 엄마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공부하느라 지친 일상이 이어졌고, 나는 또 나대로 방송을 주말까지 하면서 일에 치여 살던 때여서 우리에겐 대화를 나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었다. 아마 고등학교에 올라가 처음 치른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을 거다. 자신이 생각한 만큼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음인지 아이는 한껏 풀이 죽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때 갑자기 떠 오른 곳이 아파트 단지 건너에 있는 막창집이었다. 무슨 연유에선지는 몰라도 그 막창집에 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막창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막창 좋아하지? 우리 막창 먹으러 갈까?"


"..."


어쩌면 목표로 향하는 첫걸음부터 삐끗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음인지 아이는 좋아하는 막창을 앞에 두고도 쉬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있잖아, 이제 겨우 첫 시험이잖아. 어차피 기말고사랑, 수행평가랑 다 합산해서 1학기 성적이 나오는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 잘 알지? 막창 먹고 힘내서 다음 시험 잘 보면 돼"


그제야 아이는 굳은 표정을 풀고 한 점, 두 점 막창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숯불에 초벌구이를 해서 나오는 막창의 고소한 끝 맛이 어쩌면 그날 아이가 짊어지고 있었던 짐을 조금 덜어줬음일까. 막창 2인분을 뚝딱 해치우고 된장말이 밥까지 너끈히 먹은 아이가 불끈, 마음의 주먹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 아이는 기어코 본인이 원하던 '지역균형 선발'에 성큼 다가서는 성적으로 막창 회동에 화답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동안 아이의 중간과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면 집 앞, 그 막창 집에서 막창을 구워 먹는 것이 우리 모녀만의 은밀한 행사가 됐고, 이로 내신성적과 대학입시에 대한 중압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서로 애썼던 거 같다. 그동안 동서 덕분에 입문하게 된 나의 '막창 먹성' 까지 나날이 향상되었음도 물론이다.


동서는 여전히 막창을 사랑해 마지않는 마니아이고 아직도 '대구 막창' 비슷하게 맛을 내는 가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귀엽게 툴툴댄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대구 막창이 많이도 유명해져서 바로 조리 가능한 제품이 있는 것은 다행이라나.  아이는 그토록 원하던 학교의 학과는 가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성실하게 학업과 학교생활에 임했던 덕에 큰 격차로 '지역균형 선발'의 추천장을 따냈음은 물론이고, 무사히 훌륭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어 감사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동서와 아이에게 막창이라는 음식은 거칠어졌던 생을 윤기 나게 한 윤활유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동서에겐 어쩌면 고향의 향기, 아이에겐 지칠 때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처럼 그 음식을 먹으면서 기운을 차리게 되고, 또 다른 날들을 기약하게 만드는 고마운 원이었을지도. 아, 물론 막창 문외한이었던 나도 이 두 사람 덕에 한동안 소막창과 돼지 막창의 차이를 외지의 지인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으니 '음식' 이 가져온 생의 의외성과 연결성에  한 번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은 고기를 멀리하겠다는 다짐 때문에 막창을 먹진 않지만 막창이 내 삶에 드리워 주었던 '힐링'의 순간들을 가끔 떠올리며 위로를 얻곤 한다. 음식이라고 꼭 먹어야만 맛을 알 수 있겠는가, 음식이 품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맛은 내장 깊숙이까지 충분히 전해져 옴이니.


커버이미지 사진 제공/손혜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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