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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Dec 16. 2022

이 노래도 말한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미생 OST 중 이승열의 '날아'

해마다 연말이면 OTT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따라 추천목록으로 올라오는 시리즈들이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보면 내내 서걱거리거나 어지러웠을 마음들을 다잡게 해 주는 그런 드라마들인데, 작년 이 맘 때쯤엔 '도깨비' 더니 올해는 '미생'이다.


바둑에 완전히 문외한인 데다, 저 놀라웠다던 원작 웹툰마저 접하지 못한 상태로 만나게 된 이 드라마는 어쩌면 생각보다 큰 생의 '모멘텀'을 내게 가져다준 드라마였다. 아니 결단코 그랬다.

*재수하는 아이, 힘들었던 시간

기억을 되짚어 보니 '미생'이 한창 방영될 무렵 그 해 가을에서 겨울은 짧지 않은 삶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간들이었다. 첫 해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 아이는 서울로 올라가 재수를 하고 있었고, 아이가 대학에만 들어가면 일을 과감히 접고 하고 싶은 건 죄다 하며 살리라던 내 야심 찬 계획도 뜻하지 않게 미뤄졌다. 두겹 세 겹으로 헝클어진 실타래 같았다. 때로는 가위로 잘라서라도 당장 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답답한 날들 속에 갇혀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았다.

"엄마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아, 모의고사 성적도 좋고, 컨디션도 괜찮은 거 같아."
"그래? 다행이다. 엄마는 우리 딸 믿으니까. 잘할 거야. 끝까지 컨디션 잘 유지하고"

아이는 가라앉고 있는 마음을 애써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화 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긍정의 신호들을 언어로 내뱉고 있었다. 재수생이라는 신분이 엄격히 따지자면 학생은 아니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학생이었기에 운신의 폭도 좁고 견뎌내야 할 외부의 자극들도 많았을 텐데, 아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자신의 날들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아이의 날들이 내 생각과 추측만으로 버무려진 분홍빛보다는 훨씬 더 잿빛에 가까웠음을 알게 됐을 때 그 미안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음이다.

그렇게 서로를 안심시키는 가운데 어느덧 다시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각성한 어느 날, 드라마 '미생'이 하늘이 내린 축복처럼 내게 다가온 것이다. 삶은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리기보다는 조금 미숙하고 어렵더라도 나아가는 것이라는 응축된 메시지는 어쩌면 그 당시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주변으로부터 너무나  벅찬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아이와, 그런 아이의 학부형으로 산 고등학교 3년의 세월이 막상 '실패'라는 불명예로 끝났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재수'가 새로운 도전이라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회, 한 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좌절의 끝에는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는 용기가 생명수처럼 고여 있었다. 길지 않은 생이긴 하나, 바둑밖에 몰랐던 고졸 검정고시 출신의 인턴사원 장그래가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회사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차근차근 증명해 내는 모습에선 희열마저 느꼈다. 비록 이것이 원작 만화에 기반한 판타지라 할지라도, 어딘가에는 분명 장그래 같은 미생이 있어, 멋지게 완생으로 나아가는 날갯짓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장그래의 성장이 마치 내 것인 양 환호하고 응원했다. 그 열망은 드라마가 마무리될 무렵 주인공의 삶에 나의 어려움을, 그리고 아이의 시련을 대비해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  이승열의 <날아>가 수록된 앨범. ⓒ (주)지니뮤직


그리고 바로 드라마 제일 마지막 장면과 함께 OST로 흘러나오던 노래 '날아'가,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든 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날개 하나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있고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질 않아

까맣게 드리운 공기가 널 덮어

눈을 뜰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결국 멀리 떠나버렸고

서로 숨어 모두 보이질 않아

차갑게 내뱉는 한숨이 널 덮어

숨을 쉴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거기서 멈춰있지 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이승열 '날아' 가사



가사도 가사지만, 이승열의 단단한 목소리가 전달하는 힘은 예상보다 강했던 거 같다. 드라마가 흥행한 만큼 이 드라마에 쓰인 곡들이 참으로 많았지만 이 노래만큼 파급력이 강한 노래는 없었으니까. 사실 드라마가 방영된 시점이 한 해의 끝을 달려갈 즈음이었으니 누구나 벅참과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으로 점철되곤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접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라고,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이 노래에 대한 반응은 당시 청취자들이 보낸 신청곡 횟수로 여실히 증명됐다.


아이는 다시 한번 입시를 치르느라 이 멋진 드라마를 본방으로 볼 수가 없었는데, 모든 일정이 다 끝난 후에야 재방송으로 챙겨보면서 어느덧 주인공의 상황에 이입해 눈물 콧물 바람을 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장 원했던 학교의 입시결과를 받아 들 때까지 자신의 삶은 '미생', 그중에서도 아직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말로 스스로를 주저앉히곤 했었던 거 같다. 그렇게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이 더디 흘러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결과창을 클릭하고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의 짧은 문장을 확인한 후, 늘 혼자 조용히 듣던 노래 '날아'를 거실이 울릴 정도로 크게 틀었다. 정말 숨어 있던 날개가 활짝 펴진 것처럼 몸이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합격 후 짧은 여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아이와 나는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간의 회한에 이어 묵직한 감동이 동시에 우리 심장으로 전송돼 왔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지난 시간이 오버랩돼 전율마저 일었다. 목표를 향하는 여정엔 단 하나의 길만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우매함을 지우고, 인생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단 하나의 묘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이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듯 어떤 인생이든, 어떤 빛깔의 삶이든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멈추지 말고 날아올라야 한다는 노래가 주는 울림은 한 해의 끝자락인 지금도 감동으로 마음에 밀물져 오곤 한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라' 했던가, 우리는 그 끝이 어딜지도 모를 인생길에서 하나의 문을 열면 또 다른 하나의 문이 기다리고 있는 대단히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아갈 마음, 바로 그것은 우리가 이번 겨울 그토록 열광했던 짧은 문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카타르월드컵 당시 국가대표들이 들었던 태극기에 새겨져 있던 문장 말이다.


본인 인생에 훈수를 둘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 일 것이다. 축적된 경험이라는 자산에 근거해, 보다 현명한 묘안을 떠올리고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한 수. 그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을지 물러야 할 악수 일지는 오직 한 사람, 자신만이 아는 것일 테다.


그러니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맞는 건지 의심하지도 말고, 이 길뿐이라는 고집도 버리고 날아오를 수 있는 용기를 충전해 두면 좋지 않을까. 다시 맞은 한 해의 끝, 노래 '날아'를 들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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