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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Aug 18. 2023

아파트에 사는 당신, 행복한가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윤수일의 '아파트'

때는 대한민국이 고도성장기에 놓여있던 1980년대 후반, 주변에서는 살던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별반 다를바 없지만 당시 아파트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했다. 찐부자들은 그래도 단독주택을 고수한다는 말도 있었으나, 편리함과 청결함이 기본옵션인듯한 아파트는 거주에 대한 개념을 일시에 바꿔버릴 만큼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손쉽게 그 변화의 물결에 올라탔다. 당시의 이런 풍조엔 이를테면 꽤 부자 소리를 듣는 사람들만이 불편한 주택 생활을 버리고(?) 아파트로 옮겨갈 수 있다는 암묵적인 부러움도 깔려 있었다. 그야말로 80년대를 기점으로 '아파트'는 자가용 자동차와 더불어 제도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문양처럼 이름 앞에 새겨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냈던 짝꿍네 조차도 내 눈에는 고대광실 같았던 넓디넓은 기와집을 떠나 새롭게 지은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아니, 정원에 연못까지 있는 그 아름다운 집을 떠났다고?' 예나 지금이나 재테크에 관해선 문외한이나 다를 바 없는 나는 이런 미련스러운 의문만 품은 채, 친구네가 이사 갔다는 아파트 인근을 몇 번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맴돌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외가에서 가장 잘 살았던 큰 이모네를 필두로 홀로 생계를 꾸려가며 알뜰하게 저축을 했다던 절친의 어머니가 아파트 분양에 성공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사이 도심의 집을 팔고 외곽이라고 이주해 온 우리 집 인근에는 개발 붐이 일더니 그야말로 '상전벽해' 격으로 도시의 스카이 라인이 눈을 뜰 때마다 달라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단골 소풍장소이던 아이의 통통한 엉덩이를 닮은 언덕을 밀고, 미나리를 키웠다던 너른 밭을 개간해 지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게 되는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 아파트는 도시에서 나무를 대신해 콘크리트 숲을 이루게 됐고. 비록 남루한 집이었지만 목련나무가 봄마다 꽃을 피우는 소담한 마당이 있고, 밤이면 별을 품은 평상에 누워 밤을 지새우던 우리 집에 '불만'이라는 '불안'이 깃들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때쯤부터였을 것이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하면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
언제나 내게, 언제나 내게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떠나가 버린
너를 못 잊어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흠흠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떠나가 버린
너를 못 잊어, 워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흠흠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아파트 예
아무도,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흠
아무도,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윤수일 <아파트>, 가사


윤수일의 '아파트'는 1982년 발표되자마자 큰 인기와 반향을 일으킨 노래다. 노래자체는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국가전체가 개발 붐으로 들썩이던 시기와 맞물려 도입부의 '딩동딩동' 울리는 아파트 벨소리만큼이나 강하고 빠르게 차트와 매체를 점령해 나갔다. 가사가 품은 진짜 내용과는 관계없던 신나는 멜로디 덕에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대학가에서조차 아이러니하게도 '응원가'로 쓰이기도 했다.


이 노래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와 더불어 가끔 운동가요들을 뚫고 집단을 모으게 하는 힘을 발휘하곤 했었는데 이데올로기를 가뿐히 넘어서게 했던 이 노래만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수만 명이 광장에 운집해 스크럼을 짜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격렬한 '운동가요' 대신 이 노래 '아파트'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 물론 가사는 철저하게 시대상을 반영해 개사가 되었지만 당시 누구나 알고 있고 부르곤 하던 대중가요가 첨예한 시대까지 품고 아우르는 상황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게 온 국민의 애창가요가 돼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아파트 숲을 자양분 삼아 이 노래는 자신만의 생명을 튼실하게 연장해 나갔다.



어딘가에 존재는 하지만 세월의 부침에 따라 희미해지고 있던 노래는, 모든 것이 사라진 '디스토피아' 속 '페이소스'를 가득 품은 한 인물의 입을 통해 다시금 부활한다 여태껏 드러낸 적 없는 생경한 얼굴을 하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인공 '영탁'을 통해서 말이다. 아파트 왕국이라 불리던 나라에 대지진이 오니 아파트는 그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와 철근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한 동의 아파트와 거기에 몰린 인간군상들. 왠지 오래전 내가 느꼈던 '불만'이라는 '불안'은 다른 형태로 이 혼돈의 상황을 덮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전쟁에서 '전리품'을 잔뜩 챙겨 돌아온 전사들처럼 모두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기쁨에 들떠 있을 때, 하이에나 혹은 늑대의 눈을 한 사내 영탁은 부른다 이 노래를. 무너지고 폐허가 된 아파트 콘크리트 더미 위에서 때론 서늘하게 느껴지는 몸짓과 함께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자리한 견고한 너와 나만의 아파트'를.


살아남은 환희에 잠시 취한 자들은 알았을까, 어쩌면 이 노래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안을 이내 광기로 바꾸고 폭력으로 변질시킬 '기폭제'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노래 부르는 내내 웃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대표님 영탁의 눈동자엔 심연에서 불러낸 악마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다는 걸 말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아파트'는, 실로 섬찟했다. 민주광장에서 함께 목을 놓아 외쳐 부르던 그 노래도 아니었고 노래방에서 모두들 흥에 겨워 나누던 국민가요는 더더욱 아니었다. 마치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당신의 삶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자의 경고 같았고, 한편으론 어둠을 내리찍는 장송곡 같기도 했다.


해서, 신나는 리듬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어떤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자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에 가장 대중적인 곡을 씀으로써 오히려 반전의 영상미를 그려낸 감독의 연출의도가 노래 한 곡으로 깊이 와닿았다.


한 노래가 기막힌 '변주'를 통해 확장되고 다른 세계로 뻗어나가 원래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 이 또한 노래가 가진 힘일 테다. 늘 신나는 자리에서, 혹은 힘을 얻어내야 할 자리에서 부르곤 했던 노래 '아파트'는 어쩌면 한동안 지치고 암울한 상황을 직면할 때마다 떠올려질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한 장면, 그 장면을 압도하던 바로 그 목소리 그리고 눈빛 때문에.


세월이 많이도 흘러 '자의 반, 타의 반' 이제는 나도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친구의 아파트 이사 소식에 내심 부러워하던 스물 몇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묻는다.


"그래서 아파트에 사는 당신, 지금 행복한가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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