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만들다

사는 이야기

by 쪼교


어렸을 적 난 성우가 되고 싶었다. 토요일 9시, 그 유명한 "주말의 명화"의 인트로 음악이 들리면 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9시면 잠들어야 하는 규칙을 어기고 영화를 보기 위한, 아니 몰래 듣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잠든 척하며 어둠 속에서 나는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곧 성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이국적인 말투. 나른하게 뭉개지거나 혹은 열정적으로 울리는 목소리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보는 영화보다 듣는 영화가 더 재미있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끝까지 감상할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0분을 못 넘기고 무거운 눈꺼풀이 눈을 덮는다. 귀만 열어둔 채 버텨보지만, 간신히 5 분쯤 지나면 잠들고 만다. 그 뒤로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못다 본 영화가 제멋대로 이어진다. 꿈속에서 나는 총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러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수선한 영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귓가에 남아있는 건, 잠들기 전에 들었던 성우의 목소리뿐이다.


어쩌면 나는 영화가 아닌, 목소리 자체에 매혹돼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뭐든지 소리를 내며 읽는 것을 좋아했다. 글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즐기기 위해 읽었다. 입모양을 바꿔가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좋았다. 단전 아래에서부터 끌어올린 소리가 심장을 지나고 성대를 울리며 입 밖으로 나온다. 나는 그 소리를 가지고 노는 게 좋았다. 부드러운 소리, 강렬한 소리, 내 의지대로 톤을 조절하고, 감정도 넣어보고,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고... 종이비행기를 접듯, 글자를 소리로 만들어 하나하나 날려 보내는 식이었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글자를 올려다보는, 그런 자유로움이 나는 좋았다.

소리에 대한 내 관심은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이었다. 웅변대회에 출전할 사람을 뽑는다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원고를 읽게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힘찬 목소리로 교실을 쩌렁쩌렁 울려가며 문장을 읽었다. 그 맑고도 높게 울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나는 온몸에 털이 솟는 느낌을 받았다. 한 순간에 반한 것이다. 사람의 소리가 그토록 아름답고 통쾌하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담임선생님에게 나도 웅변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대본을 받고 한 자 한 자 열심히 읽었다. 매일 정성껏 소리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 "공산당이 그렇게 나쁜 놈들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라고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시끄럽다고 엄마에게 혼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교내 웅변대회 날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섰다. 떨리기는커녕 난 당당해졌고 세상의 중심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공산당이 왜 나쁜 놈들인지 몰랐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그저 외운 대로, 나쁜 놈들이고 죽일 놈들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나쁜 놈들을 꼭 죽이라고 말했다. 내가 만든 소리는 강당 끝까지 울려 나갔다. 친구들과 선생님 가슴속까지 공산당에 대한 미움으로 불타게 했다.

그날 나는 은상을 수상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뻤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니, 내가 만든 소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웅변 학원을 다녀 실력을 키우고 싶었다. 좀 더 큰 대회도 나가보고 싶었고 더 많은 소리를 만들고 싶었다. 난 웅변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공부에 방해되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난 더 이상 웅변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찾은 다른 방법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책의 내용과 등장인물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 수 있다. 추리소설을 읽으면 내가 셜록 홈스가 될 수 있고, 위인전을 읽으면 내가 에디슨이 될 수 있다. 또 공포소설을 읽으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벌벌 떨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책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내 기억에는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모든 글을 소리 내어서 읽었던 거 같다. 하지만 독서실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는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침묵 속에 보냈다. 암흑 속의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소리가 다시 나를 찾아온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애니메이션이 한창 유행이던 때였는데, 투니버스 TV를 보다가 성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성우가 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바로 응모를 결심했다. 1차 시험은 녹음기로 정해진 대본을 녹음한 후에 파일로 보내주면 되는 거였다. 같은 대사를 수백 번 말하고 녹음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차에 합격했다. 2차는 본사가 있는 상암동에 가서 시험을 봤다. 떨리기보다는 기뻤다. 마음껏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수많은 캐릭터에 내 소리로 생명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2인 1조로 시험장을 들어가 마이크 앞에 섰다. 난 대본을 읽었다.


"소리가 좋은데, 혹시 연극하셨나요?"

"마이크가 있으니 조금 작게 말해보세요."

"아니! 소리만 지르지 마시고 연기를 해보세요 “


마이크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마이크가 찢어지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열정만 가득했지 기술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시험 본 사람들은 소리를 예쁘게 만들어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알맞은 목소리가 입혀진 캐릭터는 마치 생명수를 마시고 살아 움직이는 거 같았다. 나도 저렇게 예쁘게 소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종에 들기 힘들 거 같네요. 연극을 한번 해보시죠.”


그 이후, 우연히 친구와 대학로에서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작고 아담한 여배우 한 사람이 목소리만으로 공연장을 쿵쿵 울리며 연기하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에 혼을 싣는 법을 알았다.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서도, 작은 소리 하나하나로 수많은 모양의 글자를 만들어 공연장 안을 꽉 채웠다. 그리고 그 소리는 관객의 가슴속에 부드러운 떨림으로 스며들었다. 나도 저렇게 소리를 만들고 싶었다.

난 그때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배우가 되면 성우처럼 다양한 소리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대에서 보았던 배우와 같이 작은 소리로 속삭여도 보고, 웃어도 보고, 소리를 질러도 보고, 울어도 보고 싶었다. 내가 만든 소리가 사람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교내 연극동아리에 입단 신청서를 냈다. 입단 테스트 자리에서,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물었고, 난 소리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했다.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난 정직하게 대답한 거였다.


“아니, 왜 소리를 만들고 싶으세요? 노래를 만드시면 될 텐데...?”

“소리를 만들어서 울림을 나누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입단이 거절되었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배우가 될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다. 단지,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성우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외치는 웅변가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무대 위에서 만들어내는 배우처럼, 나만의 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사람들이 날 바라봐 주었으면 했고, 날 동경해 주었으면 했다.


얼마 후 연극동아리에서 연락이 왔다. 배우가 사정이 생겨서 그러는데, 이번 공연에 출연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난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고서야 듣게 된 작품의 제목은 에쿠우스였다. 내가 밭은 배역은 주인공 알런을 업고 달리는 ‘1번 말’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대사가 없었다. 동물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대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작게나마 소리를 내고 싶었다. 사람의 말이 아닌 동물의 소리라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말머리 모양 탈을 쓰고 알런을 등에 태우고 힘껏 소리 질렀다.


“히~~ 이이이!”


관객들은 웃었고, 연출자는 나에게 내일부터 안 와도 된다고 했다. 난 진심을 가득 담아 말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내 의도와 상관없이 코미디가 된 것이다. 내게 맡겨진 역할은 침묵이었는데, 나는 소리를 내어 그걸 깨고 말았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가며 나는 점점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인생이 항해이고 우리가 같은 배를 타고 두 번 여행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은 달라질 것이다. 첫 여행 때는 망망대해를 헤매다 길을 잃는다 해도 두 번째 항해는 다를 것이다. 암초와 유빙 사이를 빠져나가는 경험을 하고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면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더 멋지게 소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닌, 진짜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극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진지한 말울음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난 요즘도 가끔 소리 내어서 책을 읽어본다. 글자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서, 등장인물 각각에 개성을 입힌 목소리를 만들어 본다. 그리고 다시 원점의 질문으로 돌아가곤 한다. 나는 왜 소리를 내고 싶었을까? 왜 다양한 소리를 만들고 싶었을까?


나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 가면을 벗기가 두렵다. 무엇을 하든 '척' 하는 것이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고, 가면 속에서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다.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두려울 것이 없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짜 내가 있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 가면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사람은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낄 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가? 그러니 어쩌면 나는 가면 뒤에 숨어 지내는 것이 끔찍하게 싫은 모양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 게임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 여기 있다고, 날 꺼내 달라고 소리를 만들어 내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가장 좋았던 점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아내가 부러웠다. 아내는 활기찬 소리를 마음껏 만들어 내어 감정을 표현하고,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날려 보낸다. 그런 아내가 나는 자랑스러웠다.

매일 같이 대학로 극장에 아내의 공연을 보러 갔다. 아마도 대리 만족이라는 말이 제격인 거 같다. 아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나에게 들려주었고, 사람들에게 울림과 감동을 전해주었다. 내가 잃어버린 소리를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를 잃어버린 지금, 난 혼자서 일을 한다. 어두컴컴한 연구실에 홀로 앉아 망치질을 하고 쇠를 녹이고 현미경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을 분석한다. 그렇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요 속에서 산다.

대신 나는 글을 쓴다. 글로서 무언가를 말한다는 건,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울리는 타자 소리는 다른 의미의 ‘소리’이다. 그런 소리와 언어가 잘 만나는 순간, 그것들이 겹겹이 쌓여 나에게 용기를 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아무 말하지 않고도 견디기가 괜찮다고 느낀다.

가끔은 그런 침묵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기도 한다.

어쩌면 침묵 속의 소리를 말하고 듣는 법을 터득하는 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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