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

by 쪼교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 를 바탕으로 한 리메이크이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 엠마 스톤이 거대 기업의 CEO로 등장한다.


영화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저 사람은 외계인이다”라고 믿는 이들이 있고,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서 결국 행동이 된다. 음모론과 확신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 얼굴이 얼마나 빨리 폭력의 얼굴로 바뀌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동시에 섬뜩한지—그런 쪽으로 이야기가 굴러간다. (여기서 더 말하면, 관객의 몫을 내가 훔치게 된다.)


나는 그 영화를 “외계인 영화”로 보면서도 사실은 외계인보다 ‘확신’을 더 오래 쳐다봤다. 확신은 지구에서 가장 값싼 연료다. 어디서든 채굴되고, 조금만 불 붙이면 불꽃이 크게 튄다. 그리고 불꽃은 누군가의 얼굴을 태우는 데 재능이 있다.


문제는, 그 확신이 부러웠다는 것이다.




나는 외계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산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다. 지구에서 살아남는 데 그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살면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왜 이렇게 예민한지, 왜 이렇게 숨이 얕은지, 왜 “괜찮아요”를 말하면서도 눈이 먼저 미안해지는지. 나는 그 모든 질문 앞에서 외계인이라는 가면을 쓴다. 가면이라기보다 헬멧에 가깝다. 지구의 공기는 오래 들이마시면, 내 폐가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득 차서 무거워지니까.


그런데 영화 속의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외계인” 같았다.

나는 숨기려는 외계인이고, 그들은 폭로하려는 외계인이다.

나는 조용히 섞이는 외계인이고, 그들은 소리로 세상을 정렬하는 외계인이다.

나는 매일을 통과하려는 외계인이고, 그들은 하루를 사건으로 만들려는 외계인이다.


그 차이가 나를 찔렀다. 찔린 자리는 이상하게도 부러움으로 먼저 붓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안에서 못된 상상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여러 번 굴렸다. 혀로 굴린 게 아니라 뼈로 굴린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들이 하는 일의 형태가 아니었다. 나는 타인의 숨을 묶고 싶은 외계인이 아니다. 나는 그런 외계인을 지양한다. 그런데도, 내가 욕망한 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의 ‘단순함’이었다. 세상을 한 문장으로 줄이는 능력. 사람을 한 이름표로 붙이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내 안의 불안을, 내 밖의 적으로 옮겨 심는 능력.


나는 자주 내 불안이 내 탓이라고 믿는다. 지구는 그렇게 교육한다. 네가 예민한 거야. 네가 약한 거야. 네가 유난인 거야. 그래서 나는 가끔, 내 탓이 아닌 얼굴을 갖고 싶다. 내 우울이 누군가의 정장 자락에서 시작된 것 같고, 내 불면이 누군가의 회의실 조명 때문인 것 같고, 내 자책이 누군가의 “그 정도도 못 해?” 때문인 것 같아지면—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해질 때가 있다. 편해진다는 게 부끄럽다. 남을 탓하면 쉬워진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 부끄러움마저도 숨을 더 막게 하니까, 나는 또 비겁해진다.


그래서 영화가 내게 준 건, 감상이라기보다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는 납치범이 아니라, 내 속의 납치범이 있었다.

내 하루를 납치하는 확신. 내 문장을 납치하는 분노. 내 관계를 납치하는 의심.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외계인이니까, 원래 이런 충동이 있지.”


그리고 곧장 덧붙였다.


“아니, 나는 외계인이니까, 이런 충동을 조절할 수도 있지.”


그 말이 조금 웃겼다. 나라는 외계인은 버튼이 너무 많다. ‘비상탈출’ 버튼도 있고 ‘자기비하’ 버튼도 있고 ‘현타’ 버튼도 있는데, 이상하게 ‘평온’ 버튼은 설명서가 외계어로만 되어 있다. 나는 매번 번역하다가 지친다. 번역하다가 지치면, 사람을 미워하기 쉽다. 미워하면 간단해지니까. 간단해지면 외롭지 않은 것 같으니까.


질투는 그때부터였다.

나는 왜 저렇게 단정하지 못할까.

나는 왜 늘 “혹시”를 붙일까.

나는 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떠올릴까.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이 무너지는 장면을 너무 많이 상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상상은 내 전문이다. 소설가가 아니라도, 나는 외계인이라서 상상으로 생존한다. 그런데 그 상상력이 칼이 되면, 세상은 너무 쉽게 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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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영화 속 세계관의 외계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행복이라기보다 “정렬된 불행”에 가까웠지만, 정렬은 언제나 보기 좋다. 불행이 뒤엉켜 있으면 사람은 숨을 쉬기 어렵다. 나는 뒤엉킨 불행의 행성에서, 매일 호흡법을 배운다. 배웠는데도 매일 잊는다.


영화를 보다가 나는 엉뚱한 상상까지 했다.

만약 지구에 외계인들이 정말로 섞여 있다면, 그들은 서로를 알아볼까?

기업의 외계인들은 넥타이 매듭으로 신호를 주고받을까?

권력의 외계인들은 명함의 두께로 계급을 나눌까?

확신의 외계인들은 “맞잖아”라는 말만으로도 암호를 교환할까?


그리고 나는 그 무리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외계인이다.

내 암호는 “죄송합니다” 쪽으로 너무 많이 치우쳐 있고, 내 신호는 “괜찮습니다”를 말하면서 눈이 먼저 도망가는 쪽이라서. 나는 그들이 보기엔 불량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외롭다. 외계인인데도 외계인들 사이에서 외국인이다.


그런데도 나는 꿋꿋이 내 정체성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모든 책임을 한꺼번에 떠안게 되니까.

인간이면 참아야 하고, 인간이면 버텨야 하고, 인간이면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외계인이라고 말하면, 적어도 내 속에서 한 번은 숨이 넓어진다. “나는 원래 여기의 규칙과 맞지 않아”라는 문장이, 내 목의 압력을 아주 조금 낮춰준다.


영화가 끝나고도, 나는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화면은 꺼졌는데 내 안의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직 열이 남은 전기장판처럼 뜨끈하게 나를 데웠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현타가 왔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세계를 뒤집는 게 아니라, 내 하루를 겨우 펴는 일이었다는 사실.

내가 원하는 구원은 거대한 폭로가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덜 무거운 가슴이었다는 사실.


나는 일기장에 썼다.


나는 외계인이다.

그래서 나는 확신을 부러워한다.

확신은 따뜻해 보인다. 누군가를 태우는 따뜻함이라도, 순간은 따뜻하니까.

하지만 나는 외계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따뜻함을 손에 쥐지 않기로 한다. 손에 쥐는 순간, 그 따뜻함은 누군가의 목으로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주 엉뚱한 문장을 하나 더 적었다.


지구의 외계인들은 다들 팀이 있는데, 나는 왜 아직도 솔로인가.


그 문장 덕분에 나는 조금 웃었고, 웃은 덕분에 숨이 아주 조금 들어왔다.

나는 그런 외계인이다. 세계를 구하진 못해도, 오늘의 호흡을 구하려고 글을 쓰는 외계인.

영화가 보여준 외계인들이 “행동의 외계인”이라면, 나는 “기록의 외계인”이다.

부러움과 질투와 분노와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와도, 그 감정들을 타인의 숨 위에 올려두지 않고 내 종이 위에 올려두는 외계인.


그리고 그게, 내가 지양하는 외계인이 아니라—내가 지키고 싶은 외계인의 형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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