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병아리 티를 막 벗어난 일병시절이었다. 대대 행보관(행정보급관)이 내무반 문을 열고 들어와 대뜸 내 이름을 부른다.
"조 규호"
"일병 조. 규. 호"
행보관의 별명은 미친 호랑이였다. 나를 지목해서 호출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따라와"
짤막한 한마디에 행보관을 따라나섰다. 건들건들 걸어가는 행보관 뒤통수를 보며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실수한 건 없는지를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따라 들어간 곳은 대대장실이었다. 일병 나부랭이가 대대장실에 들어가다니 이건 보통 큰일이 아닐 거라는 짐작이 갔다. 대대장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대대장은 30대 후반쯤의 나이였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별다른 사고 없이 안정적으로 진급을 하였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수색대대까지 발령받은 엘리트였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나이였다.
대대장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을 바꾸어 너그러운 미소를 짓더니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많이 보던 글씨체였다. 내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군대 생활의 가장 큰 낙이라 함은 친구, 가족, 연인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나를 위로해 주는, 말 그대로 위문편지를 받을 때마다 외롭고 힘든 군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누군가에게 답장이 오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편지를 보낸다.
" 너 뭐 하다 왔어?"
" 일병 조규호. 학교 다니다 왔습니다.'
" 네가 쓴 편지 아니야?"
" 네 맞습니다."
난 대학 때 전국 동아리 연합회 학술 1 분과 분과장이었다. 주목적은 대학생들의 활발한 문화활동을 통해 대학생활을 윤택하게 만들 자였다. 실상은 전국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학생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학생운동의 끄트머리를 잠시 맛보던 시절이었다. 난 난새의 영웅이 되고 싶었다. 군중들 앞에 서서 호령치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학생운동에는 관심 없었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의미도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뜻도 모르는 단어에 미쳐 열띤 토론을 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우리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서로의 이성관계에 대해 조언을 하고, 가끔은 대학교육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그땐 그것이 전부였다. 전공공부보다 취업걱정보다 앞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대장은 편지를 쓴 의도를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영창에 보낸다고 했다. 적어도 1년은 영창에서 썩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내 나이 스물셋, 영창을 다녀오고 남은 군생활을 마지고 제대하면 스물일곱이다. 친구들은 모두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서야 나는 학교에 복학할 수 있다. 대기업 입사지원 나이제한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럼 난 제대하고 복학하고 졸업하면 서른 살은 족히 넘어버릴 것이다. 허세 절었던 대학시절의 영웅놀이였다. 내가 영창을 가게 된다면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끝난 내가 그 이상 사는 것은 오만이라 생각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어 있을 때 소대장이 들어왔다
소대장은 내 어깨를 꾹 누르더니 윙크를 보냈다. 소대장은 학교 선배였다. 체육교육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에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ROTC를 지원했다고 한다. 20대 중반밖에 안 되는 나이였지만 몇 살 어린 병사가 보기에는 큰 댐처럼 든든했다. 마치 든든한 지원군이 온 거 같았다.
행보관은 안전을 위해서라고 나를 끝까지 영창에 보내 군기를 바로 잡아야 된다고 했다. 대대장과 소대장은 그렇게 까지 할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부대 살림꾼인 행보관은 평소에도 엄격한 기준을 가진 말 그대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사소한 보급품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꼼꼼하게 관리하였다. 하지만 행보관은 수상쩍은 행동을 하였는데 매일같이 대파나 양파, 딸기잼 등등의 식료품을 퇴근할 때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사적인 일에도 병력을 동원하였다. 예를 들어 처갓집 벼농사 수확시기에 군인들을 동원하였고,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대신에 소대가 투입되어 이삿짐을 나른 적이 있었다. 행보관은 부대와 군인들이 개인 소유인 것처럼 공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대대장과 행보관 그리고 소대장은 한 시간가량의 회의 끝에 나를 부대 뒷산에 있는 경비초소로 파견을 보내기로 했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그랬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 영창을 가기보다 억울하더라도 파견을 나가 조용히 숨죽여 지내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영창에 가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다시 내부반으로 돌려보내졌다. 선임들이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난 편지가 검열에 걸렸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고, 그 편지가 왜 문제가 되는지 몰랐다.
그날 저녁 점호 시간이 끝나고 소대장은 나를 내무반 밖으로 불렀다.
" 억울할 수도 있는데 6개월만 갔다 와라"
" 전 편지가 왜 문제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래 나도 이해해. 하지만 우리 부대특성상 문제 있는 병사를 GP에 보낸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소대장의 위로에도 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진실이 왜곡되는 거 같아서, 내 존재가 잊힐 거 같아서 나는 억울했다. 내 귓속의 '삐' 소리도 그날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6시, 아침 점호를 끝내자마자 나는 군장을 싸고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었다. 선임들과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군용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소대원들은 잘 쉬고 오라며 안부인사를 주었다. 차는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부대가 그리웠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서자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산길이 열렸다. 길가에 삐쳐 나온 나뭇가지가 자꾸 철모에 쓸렸다. 철모가 벗겨질까 봐 턱끈을 단단히 조이고 멀어지는 부대를 내려다보았다. 부대는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20분쯤 달려 비포장 도로가 끝나고 포장도로 나왔다. 오래된 작은 막사가 보인다. 막사에서 오십 미터쯤 위에는 작은 경비초소가 보였고, 그 옆에는 문이 떨어진 화장실이 있었다. 나를 태운 트럭은 간신히 족구 경기를 할만한 크기의 연병장에 세웠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으로는 철조망이 보였고 남으로는 먼 산을 넘어 민가가 보였다. 산 정상에 있는 막사는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없어 차가운 냉기가 몸을 떨리게 했다. 막사 안에서 하사 한 명이 나온다. 안경 쓴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소대장에게 경례를 하고 나를 힐끗 쳐다본다. 나는 경례를 하고 눈을 내리 깔았다. 하사는 별말 없이 내 군장을 집어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우물쭈물하던 나는 소대장에게 경례를 했다. 소대장은 어깨를 툭 치고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나는 텅 빈 연병장에 홀로 서 있다. 언제 지었는지 모를 막사는 여기저기 부서져있었고 주변은 적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작은 호가 있었다. 안경 쓴 상병이 다가오더니 들어가자며 내 등을 떠민다. 나는 경례를 한 틈도 없이 막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해가 떨어진 산정상의 날씨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막사의 난방시설이라고는 작은 연탄난로 하나뿐이었고 깨진 유리창은 A4용지를 덧대어 막아놓았다. 하사는 얘기를 들었다며 조용히 지내다가 내려가라고 했다.
제목도 모르는 영화가 생각났다. 한 겨울 전쟁 중에 한 병사가 길을 잃었다. 끝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에 있는 작은 집을 발견한다. 집안에는 이미 자리를 선점한 군인이 있었는데. 그 군인은 적군이었다. 길을 잃은 군인은 먹을 것이 있었고, 이미 집을 점령한 군인은 따뜻한 담요가 있었다. 결국 두 군인은 적이지만 서로를 의지해 살아나간다는 이야기다.
내 꼴이 그랬다. 막사에는 하사 한 명과 안경 낀 상병과 얼굴에 그늘진 일병 하나가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래 난 추방당한 군인이니까 여기서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 한다. 그리고 저들과 협력해서 살아가야 한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떠오르자, 보얀 달빛이 막사를 비추고, 손바닥만 한 나방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한겨울의 산 정상은 소름 돋도록 서늘했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눈동자 위에 몰아치듯 떨어졌다.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달마저 차갑게 식어내자 보초를 서던 군인들이 막사 안으로 모여들었다. 야간에는 보초를 서지 않고 산아래에서 올라오는 자동차 불빛만을 감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낮에는 북한군이 적이지만 어두워진 밤에는 아군이 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연탄난로 앞에 빙 둘러앉아 컵라면을 끓여 먹고 믹스커피 한잔씩 마신다. 말없던 하사와 병사들은 따뜻한 커피 한 모금씩 들어가자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는다.
안경 쓴 상병이 묻는다.
"넌 왜 올라왔냐?"
" 모르겠습니다. 편지 내용이 검열에 걸려서 올라왔습니다."
다들 키킥 웃는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얼굴에 그늘진 일병이 말한다.
"혹시 대학 다니다 왔습니까?"
"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하사가 말한다.
"너 미친 호랑이한테 걸렸지?"
" 아! 네 그렇습니다."
"여기 다들 그 행보관 눈밖에 나서 올라온 사람들이야. 여기가 왜 천덕산인 줄 아냐?
우리 같은 천덕꾸러미들만 올라오는 곳이라고 천덕산이라고 부른다"
난 천덕산이 그런 뜻인지 몰랐다.
행보관은 대학을 안 나와서 대학 나온 병사들에게 자격지심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대학에서 팔자 좋게 학생운동까지 했다고 하면 밥 먹고 할 일 없다며 한심하게 본다고 했다.
" 그럼 여기 모두?"
모두들 웃는다.
하사는 상황실칠판에 시를 썼다고 쫓겨왔고. 안경 쓴 상병은 서울대 나와서 재수 없다고 쫓겨왔고, 얼굴에 그늘진 일병은 연대 농구선수였는데 위에서 내려보는 게 재수 없어서 쫓겨났다고 한다. 키가 커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기분 나쁜 그늘이 보였다.
"그럼 편지에 뭐라고 썼길래 행보관이 널 찍었냐?"
안경 쓴 상병이 말했다.
"별 내용은 아니고 동아리 활동할 때 술 먹기 전에 외치는 구호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전 대모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활동하던 동아리는 "유네스코 학생회"라고 유엔산하기관에 속해있는 연합동아리였다. 즉 학생운동이라던가 대모 같은 것을 하는 곳은 아니고 문화탐방, 국토순례대행진 같은 것을 한다. 동아리 회칙에 행동강령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는 술자리에서 하나의 구호처럼 외치곤 했다. 그 내용을 편지에 썼는데 행보관은 북한 간첩단 활동 같은 것으로 오해했던 거 같다.
내용은 이랬다.
*유네스코 학생회 행동강령*
혼자면 독서
둘이면 대화
셋이면 합창
넷이면 운동하는 새 물결 창조에 앞장서자!
모두들 웃고 있을 때쯤 산아래에서 올라오는 자동차 불빛이 보인다. 우리 모두 철모와 총을 챙겨 들고 초소로 올라갔다.
그날은 끝없이 눈이 내렸다. 눈은 초소 창문에 붙어 녹아내리기 전에 또 다른 눈으로 덥어버렸다. 그렇게 눈으로 쌓인 초소는 흰빛으로 덮어버렸다.
나도, 편지도, 그렇게 덮어 버린 채로 잊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