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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Oct 03. 2023

귀신을 보았다!

짧은 글

나는 그 건물을  냄새로 기억한다오래된 가죽에서 나는 썩은 냄새사찰에서 나는 향 냄새계곡에서 나는 비릿한 물 냄새비 오는 날 공기 중에 퍼지는 젖은 먼지 냄새병원에서 나는 약품 냄새처럼 그 건물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콧속까지 시리게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의 냄새그 건물은 나에게 언제나 그런 겨울 냄새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서울 변두리의 작은 IT 회사에 입사한 지 한 달. 나는 여전히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이곳은, 내가 꿈꾸던 화려한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낡은 사무실 건물, 오래된 컴퓨터,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입사 초기에회사에 적응하지 못한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사람은 박대리였다그는 내게 회사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구경시켜 주었다그럼에도 나는 연구실 밖에 나가는 것이 여전히 힘들었다연구실은 나만의 어둠이자자유의 공간이자안식처가 되어갔다. 4층 연구실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정면 쪽 창문으로는 회사 전경이 내다보였고오른쪽 측면의 창문으로는 회사 밖이 보였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을 즐겼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도시의 소음은 눈 속에 묻혀 멀어지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잠시, 오른쪽 창밖 길 건너의 한 건물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건물은 주변 건물들과 달리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낡고 퇴락한 그 건물은 전체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오래된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저주받은 집 같았다. 호기심에 끌린 나는 박 대리에게 그 벽돌 건물은 어떤 회사인지 물어보았다.


"아, 저 건물 말씀하시는 거예요?" 박 대리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저긴 어느 유명 가구회사의 창고예요. 인기 상품이 아니라 오래된 재고상품들을 저장해 두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설명은 단순했지만, 왠지 모를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 대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사실... 저 건물에 대해서는 좀 특이한 소문이 있어요. 관리인과 제가 좀 안면이 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개해 드릴게요."


그의 말에 나는 더욱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 이상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 질 녘, 붉은 노을빛에 물든 그 건물은 마치 피에 젖은 듯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 대리는 건물 안까지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를 이끌고 그 건물 앞으로 데려갔다. 전날 내린 폭설로 마당에는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밭이었다. 흰빛이 사람을 압도하고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흰 눈에 반사된 햇빛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건물의 빛바랜 벽돌 외벽과 여기저기 깨진 유리창은 간신히 숨만 쉬는 숨구멍 같았다.


"조심하세요, 미끄러워요," 박 대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김 부장님이 안에 계실 거예요. 그분... 좀 특이하신 분이에요."


우리는 조심스럽게 눈밭을 걸어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소나무 냄새와 타다 남은 재냄새가 뒤섞인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건물 안 어두운 구석에는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가구들이 비닐로 칭칭 감겨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는 가구를 만들다 만 듯한 목재가 자신의 유예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등을 꺼둔 건물 내부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깨진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간신히 공간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대리는 그 냄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방향을 잃은 나도 박대리를 따라, 냄새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김 부장님." 박 대리가 인사를 했다. "여기 새로 온 직원 소개해드릴게요. 조규호 씨예요."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그는 60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눈은 피곤해 보였다. 그는 담배를 문 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조규호라고 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김 부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내부는 불에 타다 만 듯 여기저기 그을려 있었고, 물에 젖은 포장 박스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공기 중에는 썩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여기 냄새가 별로죠?" 김 부장이 갑자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어딘가 슬픈 느낌이 묻어났다.


"네... 좀. 사실 이 건물에 대해 들은 소문이 있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여기 귀신 같은 게 나온다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친구가 그런 소리를 믿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신이란 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야.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슬픔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로는 산 사람보다 귀신이 더 인간적일 때가 있지."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박 대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 그럼 우리 이만 가볼게요. 김 부장님, 안녕히 계세요."


우리는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박 대리가 말했다. 

"원래는 이 회사 간부였대요. 근데 몇 년 전에 있었던 화재 사고 이후로... 혼자 남아서 이 건물을 지키고 계시는 거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화재 사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박 대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3년 전, 이 건물에서 큰 화재가 났어요. 그때 두 명이 사망했대요. 한 명은 화재 당시에, 다른 한 명은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


그의 말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그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 이후로 김 부장님은 혼자 남아 이 건물을 관리하고 계신 거예요. 다들 떠나고 싶어 했지만, 그분은...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박 대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그 건물을 돌아보았다. 햇빛 아래 서 있는 그 건물은 여전히 음산해 보였지만, 이제는 뭔가 슬픈 기운도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창밖으로 그 건물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매번 김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때로는 산 사람보다 귀신이 더 인간적일 때가 있지."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점점 그 건물과 김 부장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겨울이 끝나갈 때쯤 눈밭의 눈은 스스로 거의 사라져 버렸고,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만 녹다 남은 검은 눈이 숨어 있었다. 회사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종종 그 건물과 김 부장을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이 도시의 숨겨진 비밀 같았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때의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건물 밖 인도에 남아있던 눈을 누군가가 허리를 숙이고 쓸고 있었다. 김 부장이었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 같았다. 


충동적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김 부장에게 다가가며, 나는 어색함을 뚫고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 부장님. 수고하십니다."


"아! 네..." 


김 부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김 부장은 짤막한 대답과 함께 허리를 뒤로 젖히고 빗자루를 한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나를 향해 손을 뻗쳤다.


"한 대 피시려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그의 호의를 사양했다. 대신 나는 연구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믹스커피 두 잔을 타들고 돌아왔다. 그 중 한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김 부장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받아들더니 훅훅 불었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서 관리하시나 봐요?"


"네..."


"좀 무섭거나 외롭지 않으세요?"


내 말에 그는 양쪽 입꼬리를 삐쭉 내리 깔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반응에 나는 겸연쩍어졌지만,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일전에 박대리가 꺼낸 말이 떠올라 농담반 진담반으로 웃음을 섞어 다시 질문을 건넸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하하하"


그러나 김 부장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김 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가끔 나오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김 부장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담배를 검은 눈 위에 던졌다. 담배는 발악하듯 반짝이며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젊은 친구," 그가 말을 이었다. 


"귀신은 그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거야. 후회, 죄책감, 그리움... 그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지."


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김 부장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환영이 때론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지. 이 건물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김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구실로 돌아와 나는 창밖에 보이는 그 건물을 뚫어지게 보았다. 검은색으로 바랜 외벽은 녹아내리는 눈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붕에 남아있는 눈도 군데군데 모여 줄지어 검은 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 건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귀신이 정말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왜 나타나는 걸까?


어릴 적 즐겨 보던 '전설의 고향'이 떠올랐다. 그 드라마에서는 항상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귀신으로 나타났었다. 그렇다면 저 건물의 귀신들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걸까?


문득 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젊고 예쁜 처녀, 불쌍한 아기, 엄마 없는 아이... 왜 힘센 남자 귀신은 거의 없을까?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히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 부장의 건물에서 죽은 사람들은 청장년층 남성들이었다. 만약 정말 귀신이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떨까? 처녀 귀신이나 동자 귀신 대신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한 귀신...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전설 속 귀신들의 사연은 대부분 비현실적이고 상투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끔찍하고 억울한 죽음들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학살 피해자들은 왜 귀신이 되어 복수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건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혹시 귀신 이야기는 단순히 불행한 사고를 설명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방어 기제는 아닐까? 인재를 인정하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호기심이 생겨 귀신 목격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경우 환각 증상이라고 한다. 뇌의 측두엽에 문제가 생기면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나 피로도 귀신을 보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기가 허하면 귀신을 본다'는 속담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구나."


노트북을 닫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은 없다. 그저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은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창밖으로 다시 한 번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반사된 유리창이 나를 향해 번쩍였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커튼을 쳤다.





 겨울이 모두 지나가고 비릿한 흙내음이 풍겨오던 이른 봄의 어느 날이었다이직한 회사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나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내 정신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어느 날  업무 실수로 인한 질책을 받고 연구실로 돌아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그 건물이 보였다회색 건물은 봄비에 씻겨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벽돌의 원래 색깔인 갈색이 돌아와 있었고꺼멓던 옥상 지붕은 은색의 시멘트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건물 옥상 한쪽 모서리에 어둠이 뭉쳐있는 듯한 형체가 보였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착각이길 바라며.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옥상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검은 형체. 처음에는 커다란 까마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까마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몸이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결국 떨리는 다리로 연구실을 나섰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고개를 들어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태였지만, 동시에 사람이 아니었다. 불에 탄 듯 새카맣게 그을린 옷, 재로 뒤덮인 얼굴. 그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대신 깊고 어두운 구멍만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순간,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텅 빈 눈구멍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찬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그것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의 잔상은 여전히 내 망막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나 연구실로 돌아왔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봄비에 젖은 옷 때문인지 한기가 느껴졌다.


10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곧장 김 부장을 찾아갔다. 그는 건물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그의 주변을 맴돌며 흐릿한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 모습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김... 김 부장님,"

 내 목소리가 떨렸다. 


"저기... 제가 방금..."


김 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깃든 깊은 슬픔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건물 옥상에서... 무언가를 봤어요."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사람... 아니, 귀신 같은 게..."


김 부장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언젠가는 볼 줄 알았소."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쉬어있었다. 


"그 녀석들, 가끔 그렇게 나타나곤 하지."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석들'이라뇨? 그럼 정말로..."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본 게 맞아. 하지만 겁낼 것 없소. 그들은... 그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일 뿐이야."


그의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 부장은 내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오. 재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그 건물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예상했던 것처럼,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한동안 연구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건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건물과 김 부장, 그리고 그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김 부장을 찾아갔다.


"김 부장님, 그때 그 존재들... 누구인가요?"


김 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3년 전 화재 때 죽은 직원들이야. 내 책임이었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전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았어. 내 과실로 두 명이 죽었고, 난 그들을 구하지 못했어."


김 부장의 고백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제서야 그가 왜 이 건물을 떠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원망하나요?"

김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은 그저... 돌아가고 싶어 해. 하지만 난 그들을 보내줄 수가 없어. 내 죄책감이 그들을 붙잡고 있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래 귀신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였다. 우리의 후회, 죄책감,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영.


나는 연구실로 돌아와 김 부장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연구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그 모습은 달라 보였다. 더 이상 음산하거나 불길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평범한 건물일 뿐이었다.


문득 김 부장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귀신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거야. 후회, 죄책감, 그리움... 그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지."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귀신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야. 우리의 감정, 우리의 기억, 우리의 상처가 만들어낸..."


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 귀신들을, 아니 우리 마음속의 그림자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건 결국 우리 자신뿐이라는 것을.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 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나의 고통이 느껴졌다.


"이제 조금은 자유로워진 걸까?" 

나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그 건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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