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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이 Nov 13. 2019

저 입을 매우 쳐라

사회 초년생 시절 일이다. 신입 동기 몇 사람이 모여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카페 2층에 자리 잡은 우리는 종이에 주문 내용을 적어 정리했고,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K와 함께 1층으로 가 음료 주문을 했다. 결제는 내 카드로 했는데 그때 나는 ‘이건 내가 사야지’하고 생각했다. 내가 사야 할 어떤 이유나 맥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순간 내가 사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고 그날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화기애애했다. 모임이 마무리될 무렵 어떤 이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모습으로 “참, 이거 누가 계산했어요?”라고 말했다. 엔빵을 하기 위해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보통 한 박자 느리게 답하는 스타일인데, 그 한 박자가 채 지나기 전에 K가 불쑥, 약간 허세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거 제가 사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오오 이 사람이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네.’ 어어 그런데 1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이거 실은 제가 산 거 아니에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거 뭐지? 쟤 왜 그다음 말은 안 하는 건데?’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모임이 다 끝나도록 내가 샀다는 말은 K에게서 나오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그렇게, K가 샀다고 하는 차를 마시고서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질 때의 K 표정은 “뭐 무슨 일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또 다른 어떤 날.
나는 당시 십여 명이 사용하는 사무실에서 근무했는데, 잠시 외부 일을 처리하고 사무실에 와보니 K 혼자 있었다. K는 나에게 “A님이 모두들 드시라고 아이스크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셨어요.”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5분에서 10분쯤 흐른 무렵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고, 그 사람이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어? 이거 웬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K는 너무도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사 왔어요.”


하..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기가 막히고도 어이없는 시추에이션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짓말도 거짓말이지만, 이건 지금 나를 농락하는 거잖아.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냥 지켜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거짓인 줄 뻔히 아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사람을 난생처음 겪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 하면 이건 뭔가 손쉽게 합리화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때 분명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K 씨, 방금 전에 A님이 사 온 거라고 저한테 그러셨는데 지금은 본인이 사 왔다고 하네요? 뭐가 사실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번 일을 함께 언급하면서 그때 내가 느낀 의아함이나 불쾌함을 표현하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모욕감마저 느낀다고 표현했어야 한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매우 쳐야 할 입은 K의 입이 아니라, 두 번의 상황 모두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스스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의 입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왜 그때, 두 번씩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있었던 걸까.
묵언수행 중이었을까?
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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