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비에 대처하는 방법
나는 비를 맞는 게 싫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비를 맞는 일'은 아마도 꽤나 높은 순위에 꼽힐 것이다. 이것은 비가 오는 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찐한 커피를 마시는 감성을 즐길 줄 아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비를 맞는 것은 현실적으로 꽤나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다. 젖어서 찝찝하고, 머리와 옷은 다 망가지고, 옷을 말리면서 냄새도 나는 거 같고, 무엇보다 치명적으로 안경에서 눈물이 흐르게 되는 안경잡이의 설움..
비를 맞는 일과는 별개로 나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비가 오면 처지고 우울해진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냥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도 좋고, 그 날씨 특유의 센티함도 좋다. 뭔가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느낌도 든다. 난 심지어 비 오는 날 듣는 노래들의 플레이 리스트를 따로 챙겨 놓을 정도인데 최근에 취향저격을 많이 당하고 있는 폴 킴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 '비'라는 노래를 한동안 꽤 많이 즐겨 들었었다.
어느새 비가 내린다. 그렇게 준비 없이 비를 맞는다. 점점 거세지는 비가 두렵다. 하지만 이 비도 곧 그치겠지.
감수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멘트지만, 준비 없이 비를 맞는 일은 노래 속에서만 아름답다. 내 젖은 생쥐꼴을 떠올려보면 한없이 찌질해 보일 뿐이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비와 노래를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질 뻔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미국에 오래 살아도 적응되지 않는 일에 관해 적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때마침 이곳 샌프란 시스코는 1월의 우기를 지나쳐가고 있다. 몇 주에 걸쳐서 퍼붓다 쉬고 퍼붓다 쉼을 반복하며 비가 내렸다. 불가항력으로 축축한 몇 주를 보내야 했지만 이 건조한 캘리포니아엔 아마도 소중하고도 꼭 필요한 기간 이리라. (사실 이번엔 내 우산 하나를 처참하게 망가트려버렸을 만큼 역대급 레인스톰이 몰아쳤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올 때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다닌다. 그게 이슬비라거나 혹은 우산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서만 적용되는 경우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아마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폭우에 가까운 비가 쏟아질 때도 그냥 후드나 캡 모자만을 뒤집어쓴 채, 아니면 그런 최소한의 방어막 조차도 없이 하릴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사람들을 아주 흔하게, 도시 곳곳에서 잦은 빈도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는 분명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한 손에 우산을 떡하니 들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걸 펴지 않고 맞으면서 걸어간다. 참으로 희한하다면 희한한 일이다. (Fun fact - 샌프란 시스코에 1년 중에 내리는 비의 80% 이상이 12월~3월 중에 내린다. 그래서 축축한 겨울은 모두에게 익숙한 계절이다.)
한국의 비 오는 날 광경을 살포시 떠올려 본다. 한국에서는 비를 자발적으로 맞는 사람을 찾기가 비교적 힘들다. 비가 오는 날 이 건물 저 건물 입구에서 비를 피하며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굴리거나 소나기라면 곧 지나쳐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책이나 가방, 혹은 다른 무언가 표면적이 넓은 물건으로 비를 덜 맞으려 머리를 가리며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준비 없이 비를 만날 땐 나 또한 어김없이 그 모습들 중 하나였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더 여유로운 걸까. 그까짓 비 좀 맞는 일쯤은 별것 아닌 일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산성비와 산성비가 아닌 것의 차이일까. 처음 미국에 와서 사람들의 비 맞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내 마음속에 신기함보다는 이런저런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짱구를 이리저리 굴려 보아도 객관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에서만 살아왔지만 비를 맞는 것이 딱히 캘리포니아만의 문화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비를 맞고 다니는 것은 아닌데, 맞고 다니는 사람들의 비율이 내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어느 순간 그냥 여기서는 그런가 보다 하면서 타협한 현상에 비로소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 본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부터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고 철저하게 학습받는다. 엄마로부터, 아빠로 부터, 형, 누나로부터, 학교에선 선생님으로부터,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같은 얘기들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오늘 비 온대, 우산 갖고 가."
"비 맞지 마. 감기 걸리니까."
"비 왜 맞고 다녀. 날씨 확인 안 했어?"
"우산 안 갖고 왔어? 왜?"
"머리 빠지면 어쩌려고 비를 맞고 다니냐."
나도 그랬고,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배웠다. 비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맞지 않는 것으로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다면 미국 사람들은 그런 학습 과정이 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 아이들은 자라면서 비를 맞는다는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얘기 듣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도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처음부터 비를 대하는 습성 자체가 아예 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산과의 친밀감이 비교적 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산이란 건 밖을 걸어야만 필요한 것이니까.
Are people really umbrella-phobic?
비가 자주 오는 시애틀에서도 사람들이 우산을 잘 쓰고 다니지 않는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정말 이 나라 사람들은 우산 공포증이라도 걸린 것인가? 2017년에는 오레곤주의 한 신문사에서 1700명가량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주어진 질문은 "비가 오는 것이 예상될 때 얼마나 자주 우산을 챙겨 나가는가?" 였었다. 가히 충격적 이게도 66%가량이 절대(never) 안 가져간다고 했고, 5%만이 항상 가져간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황스럽게도 안 가져간다고 했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 이유로 그저 손이 자유로운 것이 더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답변 실화?! 리얼리?? 젖어서 찝찝한 거보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귀찮음이 더 싫다고..? 솔직히 미국 사람들 사이에 그런 귀차니즘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유롭고 편한 것을 추구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경험상 대부분 나름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비를 맞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결코 합리적이지가 않다. 무조건 손해 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대답이 쉽게 납득되기가 힘들다.
So Americans seldom use umbrellas. What about Europeans?
한걸음 나아가서 유럽 사람들도 비가 올 때 우산을 잘 안 들고 다닌다는 사실은 꽤나 익히 알려져 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나오던 TV 프로그램인 비정상 회담에 언젠가 나왔던 한 아일랜드 청년도 비슷한 느낌의 얘기를 했었던 걸로 기억된다. 아니, 서양인들의 피부는 방수코팅이라도 되어 있어 비에 덜 젖기라도 하는 것인가? 같은 미국인이라도 동양계 미국인들보다 백인들이 더 비를 많이 맞고 다녔던가? 이런저런 말도 되지 않는 질문들이 파생되며 머리를 어지럽히는데 도무지 공통되는 이유의 접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위에서 언급한 '귀차니즘'의 이유를 제외하고 곰곰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온갖 이유들을 나열해 보았다.
1) 우산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2) 어차피 비바람이 심하게 불면 여기저기 흔들리고 뒤집히는 우산은 오히려 더 걸리적거릴 뿐이다.
3) 후드가 달린 방수가 되는 훌륭한 재킷들이 너무 많고 편하다.
4) 비를 좀 맞는 것이 오히려 시원하고 좋다.
5) 우산은 귀찮고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존재이다.
6) 우산을 드는 것이 창피하다.
7) 비가 온다는 것 자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8) 산성비라는 개념이 없다.
9) 그냥 안 든다.
유럽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나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현실적인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일단 날씨 자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유럽 쪽에서는 비가 내릴 때 굉장히 예측불허로 띄엄띄엄 오는 경우가 많기에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기에도 애매하고 안 가지고 나가기에도 애매한 날씨들이 반복되다 보니, 그리고 혹여 비가 온다 해도 조금씩만 왔다가 금방 그치는 형태라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지 않기에 거추장스러운 우산이라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쓸모를 잃게 된 것이다. 그래, 유럽에선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폭우가 내려도 우산을 쓰지 않는 미국인들의 행동은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이는데 거기에 아무런 이유도 없을 리가 없다. 정말 귀차니즘이 1순위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순전히 내가 만나온 미국인들의 성향이나 주변 미국인 친구들의 모습들을 토대로 나 혼자만의 결론을 내리자면 1) 번과 7) 번이 반반쯤 섞여 있는 게 대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나는 비를 맞는 게 싫다.
비 오는 날 우산의 각도를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해 봤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비가 많이 올 때 최소한으로 젖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평소보다 보폭도 좁히고 걸음걸이도 더 천천히 걸으려고 노력한다. 매의 눈을 켜고 고여있는 물웅덩이는 무조건 다 피해야만 하며,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릴 때는 자칫 지나가는 차로 인해 물이 튈 수 있는 쪽으로는 가까이 서있지도 않는다.
그런 나조차도 생각 없이 비를 맞고 다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3년 내내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더랬다. 비에 맞았다고 크게 짜증 냈던 기억도, '우산이 없는데 젖으면 어떡하지'하는 고민을 했던 기억도 없다. 옷은 말리면 그만이었고, 몸은 씻으면 그뿐이었다.
꼴랑 비하나 가지고 확대해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 모든 일에 이토록 예민해진다. 다음 수를 계산하게 된다. 그저 방지하고 싶을 뿐이다. 비를 맞는다는 행위 자체가 싫은 것보다도, 옷을 세탁하고 몸을 씻고 여러 가지 뒤처리를 해야 하는 그 귀찮은 과정을 겪어야 할 명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쉽게 막을 수 있는 수고를 굳이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라는 소재 하나를 두고 문화적(?)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만큼 미국에 살면서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사실 아직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완벽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비를 대하던 자세를 이 곳 사람들은 평생 동안 유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들처럼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비를 피해 다니겠지.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어린 시절 그때처럼 비를 맞는 일이 별 것 아닌 일로 느껴지는 날이 나에게 온다면, 뭐 한 번쯤은 쫄딱 젖어 보는 날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