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회계사로 살아가기 - #1 (부제: 미국 직장생활)
캘리포니아에서 회계사(CPA)로 일하고 있다. 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회계 석사를 마친 뒤 대형 회계법인인 PwC에 입사했다. 5년이 넘는 시간을 재직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시간이 더 흐른 지금은 프라이빗 에퀴티 (Private Equity) 혹은 사모펀드라고 불리는 한 투자회사의 재무팀에서 회계사로 몇 년째 일하고 있다.
#첫인상 (a.k.a 신입사원)
처음은 늘 낯설고 어려운 법이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처음 입사한 회계법인 PwC는 대기업답게 굉장히 체계적인 곳이었다. 다른 대기업들도 비슷하겠지만, 첫날 첫 출근과 동시에 신입사원들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인사팀의 오전 환영식과 각종 오리엔테이션, 팀원들과의 소개 및 점심 식사, 버디(Buddy)라고 불리는 1년 위 선배사원의 내 자리 안내 및 오피스 투어, IT팀의 회사 컴퓨터와 책가방 배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내 앞으로 이미 와 있는 하나의 이메일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앞으로 2주간 해야 할 교육 목록이 담겨 있었다. 맹수가 새끼를 야생에 던져 놓는 양 아무런 교육도 없이 직접 부딪혀 가며 일을 배우게 했던 내 대학 시절 몇몇의 아르바이트를 떠올리며 긴장감 속에서 출근했는데 노파심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비로소 내가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된 것을 확인했다.
신입사원의 생활은 감사하게도 굉장히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자잘한 실수는 용납되고 잘하면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모든 윗사람들이 '고작 신입'인 나를 굉장히 존중해주었는데, 꽤나 조심스러워서 가끔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어쩌면 내가 윗사람들을 지나치게 예의 갖추고 대했기에 그들도 나에게 좀 더 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직장 생활은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인간관계가 수평적이다. 문화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언어 자체에 존댓말이 없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일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처음 회사를 다니면서 같이 입사한 미국 동기들이 윗사람들과 얘기할 때 다리를 꼬고 앉아 깎지긴 손을 머리 뒤로 한다던가, 나는 한없이 어렵고 높게만 보이던 가장 높은 임원분들마저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되었는데, 미국 직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자 동시에 부러움이기도 했다.
처음 업무가 주어질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하나 있다. "Don't spin your wheels"라는 말인데 모를 때 혼자 끙끙 대고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이 말에는 그 나름의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열심히 혼자 연구해서 스스로 답을 알아내면 기특한 거 아님?'이라는 생각이 들기 쉽지만, 신입이라도 무작정 시간을 쓰면서 답을 찾아내는 것은 회계법인 내에서는 구조상 아주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다. 신입시절 내가 가장 어려웠던 점 중의 하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게 되면 정신 없어지는 순간이 많이 있었는데, 무슨 프로젝트에 언제 얼마큼 시간을 투자하고, 무엇을 우선순위로 해야(prioritize)하는가를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 프로젝트마다 다 달랐는데, 그 사람들의 스타일이 너무 많이 다를 때는 어느 장단에 어떻게 맞춰야 할지, 어떤 방식이 더 좋은 것인지가 꽤 고민이었다.
#영어의 중요성
미국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는 영원히 완벽해질 수 없다.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 출신으로 미국의 직장 생활에서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는 계속 따라다닌다. 실제로 입사 시에 내 영어 실력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형편이 없었다. 대학교를 수년간 다녔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좀 더 고급진 영어나 직장에서의 프로페셔널한 커뮤니케이션적인 부분에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면접은 피나는 연습으로 어찌어찌 뚫어 냈는데, 앞으로 회사에서 겪어야 할 영어와의 전쟁은 첩첩산중이었다. 미국에 사는 외국인의 영어 실력은 사실 그 사람이 몇 살에 오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이 결정되는데 나이가 한 살씩 어려질수록 기하급수적인 차이가 난다. 언어를 어렸을 때 습득해야 한다는 것은 괜한 정설이 아니다. 스무 살에 미국에 건너온 나와 열여덟에 건너온 사람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나고, 그 나이가 한 살씩 어려질수록 문법이나 읽기도 그렇지만 특히나 발음과 리스닝, 더 나아가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미국에서 직장인이 되면서 영어 스트레스에 계속 시달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현재 진행 중) 경력이 많아지고 직책이 올라갈수록 아랫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관리해야 하므로 영어의 중요성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다. 업무와 관련된 일상의 일들은 그럭저럭 문제가 없으나 가끔 큰 미팅을 진행해야 한다거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일이 생기면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곤 한다. 그나마 다행힌 것은 캘리포니아의 직장 문화가 좋은 것이, 그 사람의 영어 발음이나 문화적 배경 혹은 인종 같은 기준으로 절대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데 이는 아무래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은 곳이기에 미국내 다른 지역의 백인 위주의 도시나 이민자들이 거의 없는 도시들과는 좀 차이점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 발음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이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사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영어 발음에 생각보다 굉장히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발음보다는 억양이 더 중요하다. (지역차는 분명히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혼자 소심한 마음에 영어를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굉장히 말을 좀 아끼고 조심했었는데, 중국인 선배의 속사포 같은 막무가내 영어를 들으면서 나 혼자 너무 지나치게 걱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내다 보면 발음이 정말 엉망진창인 사람들도 많아서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PwC를 다닐 때 회사에서 내 영어 실력에 대해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었는데, 생각해보면 되게 감사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어떤 외국인이 직장에 다니는데 언어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면 당연히 그 사람이 더 열심히 해서 문제가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입사하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즈음, HR이었던 M 씨가 어느 날 나에게 웃으며 다가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한 가지 했다. 내가 업무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업무적인 실력이 아닌 표면적인 영어 실력 때문에 앞으로 어떤 선입견을 받길 원하지 않는다며, 나에게 회사의 지원 아래 조금 전문적인 직장인 비즈니스 영어 수업을 들을 것을 제안했다, 신입으로서 전혀 내 영어에는 문제가 없으나 앞으로는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입장과 함께. 사실 황송한 제안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 길로 즉시 수업을 등록해 듣기 시작했다. 심지어 같은 팀에 다른 한국인 동료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회화 선생을 회사로 불러주기까지 하는 정성을 보여주었으니 진심으로 미국 회사에 대해 신기한 감정과 함께 살짝 감동했던 일중에 하나였다.
#회식문화
나는 회식이 싫었다.
아니, 아마도 싫어할 것이다라고 직장 생활을 겪어보기도 전부터 생각했다. 그날의 업무가 끝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집에 가서 쉬거나, 무엇을 하든 간에 어쨌건 회사로부터는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이 내 오래된 철학이다. 한국처럼 정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삭막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미국의 회사생활은 회사 내의 인간관계가 회사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연결이 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그게 참 깔끔하고 좋다. 내 개인 핸드폰으로 회사의 누군가가 전화하는 일도, 상사나 부하직원의 경조사에 참석해야 할 일도 없다. (업무시간 외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회사 이메일을 통해 연락한다.) 가끔 한국의 직장 얘기를 듣게 될 때면 조금 심하다 싶을 만큼 공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데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최소한 이런 측면에서는 나에게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미국의 회식 문화가 한국과 가장 다른 점은 '강제성이 거의 없다'라는 것일 것이다. 물론 잘 모르는 신입 때는 왕따 당하지 않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회식자리는 웬만하면 참석하려고 했었는데 보통은 "나 약속 있어요." "어디 가야 돼요."라는 식으로 어물쩡 핑계를 둘러 대고 불참해도 별다른 후폭풍은 없었다. 더군다나 회식이라고 해서 윗사람이 소위 법카로 맛있는 걸 쏜다거나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자기 돈(!)으로 자기 술과 음식을 각자 시켜 먹는 경우라서 '굳이 내 돈을 쓰면서 회식을 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드는 아이러니 한 경우가 많았다. 회식의 잦음은 회사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미국은 한국에 비해서는 평균적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PwC의 경우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젊은 사람들이 전체 직원의 대다수였기에 그래도 꽤 종종 회식을 하는 편이었는데, 주로 해피 아워(Happy hour)라고 주로 불리는 1차에서 마무리되는 간단한 술자리들이었다. 이런 간단한 술자리마저 가족과의 생활을 중요시하는 미국에서 기혼자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 편인데, 직원들의 평균 나이대가 훨씬 올라간 지금 다니는 사모 펀드의 경우는 회식은 연중행사이다. (Fun fact - 사실 해피 아워라는 용어 자체는 식당, 바 같은 데서 식사시간 사이에 음식이나 술을 몇 시간 동안 더 싸게 파는 문화에서 기인하는 데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퇴근 후 간단히 술 한잔 하자고 할 때 '해피 아워 갈래?'라고 주로 한다.)
#LGBT
LGBT란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를 줄여서 지칭하는 말이다.
PwC 신입 때 나에게 다소 충격적이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처음 입사 후 나름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차림에 꽤 신경을 쓰고 다녔는데, 내가 게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팀 안에서 잠깐 돌았었다는 사실을 시간이 좀 지나고 친한 동료를 통해서 알았다. 여자를 좋아하는 신체 건강한(?) 남자로서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그야말로 멘. 탈. 붕. 괴. 아무래도 입사 전에 한국에 놀러 갔다 와서 핏이 몸에 딱 떨어지는 코트를 사 와서 입고 다녔는데, 그탓이 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이야 유럽식의 쫙 붙는 스타일이 여기서도 흔하디 흔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대부분 남자 직장인들은 대부분 펑퍼짐한 옷들을 입고 다녔는데 가뜩이나 호리호리한 체형에 딱 붙는 코트를 입고 다녔으니 좀 여성스러워 보였을지도. 그런 면에서는 미국에서도 게이들에 대한 어떤 선입견들이 존재하긴 했다. (남자가 너무 꾸미고 다닌다던지, 옷차림과 헤어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던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좀 덜 꾸미고(?)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 코트는 입고 가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특히 샌프란 시스코는 동성애자들의 파라다이스이다. 한국에서 샌프란 시스코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 곳은 동성애자의 문화가 굉장히 오픈되어 있고 커밍아웃이 굉장히 보편화되어있어서, PwC에 다닐 때에는 가장 높은 파트너들 중에도 방문 앞에 무지개색 깃발을 달아놓는 다던지,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여 당당하게 자신의 동성애자 파트너를 소개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LGBT라는 용어 역시 직장 내에서 흔히 사용되는데 이를 지지하는 모임이나 이벤트 같은 것도 사내에서 활발하게 일어난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사모 펀드에는 자신의 와이프라며 회사 연말 파티에 항상 동성 파트너를 손잡고 데려오는 50대 후반 레즈비언 아줌마도 있는데 아직까지 동성애자들에 관해서는 타부(Taboo) 시 되는 경향이 있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들 신기한 일이다. (Fun fact - 무지개는 게이 프라이드를 상징하는 심벌로 쓰이고 있는데, 여러 색깔이 들어 있는 무지개처럼 다양성을 나타내기 위해 7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문직
전문직이 좋은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평생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첫째일 것이다. 그리고 안정적이다. 회계사라는 직업 역시 미국에서 상당히 안정적인 직업군에 포함된다고 여겨지는데, 경기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덜 타는 직업이기도 하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겼어도, 내가 있던 PwC에서 감사(Audit)와 세무(Tax) 팀은 연봉 동결은 될지언정 해고를 당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래도 같은 클라이언트가 계속 유지되는 경우가 많기에 매년 다시 하게 되는 업무가 (recurring job) 많은 덕택도 있었을 것이다. 컨설팅 쪽이나 어드바이저리(Advisory) 쪽은 아무래도 프로젝트 베이스인 경우가 많다 보니 큰 규모의 경제 위축이 있을 때는 조금의 인원 감축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 같기는 하다.
직업마다 사회가 갖는 선입견이 있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미국에서 회계사에 대한 보통 사람의 선입견은 뭔가 딱딱한 안경을 끼고, 하루 종일 숫자와 씨름하며 살짝 까다로운 이미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쓰고 보니 그다지 좋지가 않다니..) 내 실제 경험에 비춰보면 회계사들은 대체로 침착하고 점잖은 성격이 많은 것 같긴 한데 사실 케바케이긴 하다. 밴 애플렉 (Ben Affleck)이 주연한 영화 어카운턴트(Accountant)를 보면 회계사로 설정된 주인공은 자폐증을 앓고 있고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숫자와 자료에 강박적인 완벽함으로 집착하고 또 수학적으로 천재적인 사람으로 표현되었는데 캐릭터 자체가 서번트 증후군이라서 극단적이기는 하나 작은 부분들에서 조금씩 내가 느끼는 회계사의 완벽을 추구하는 (가끔 또라이스러운) 기질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1불이 틀린 것까지 다 찾아낸다거나, 숫자를 표기할 때 쉼표가 없으면 짜증이 난다거나.. 물론 싸움을 엄청 잘하는 어둠의 회계사 설정은 신박했다!
다시 급 포장하자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은 사실 굉장히 뿌듯한 일이다. 회계사라는 직업이 예전보다 위상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뭔가 전문가로서의 포스도 느껴지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커리어 패스(Career path)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나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괜찮은 위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요즘 가장 큰 숙제는 한 번씩 찾아오는 매너리즘인데, 신입의 열정이 어느 순간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으로 변하는 순간은 한 분야에 집중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오는 듯하다. 현재의 삶에서 좀 더 보람을 찾기 위해 그저 노력할 수밖에.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
미국의 직장 생활은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의 반복이다.
너무 다른 인종들, 다른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문화일 것이다. 한국은 단일 민족이기에 사는 모습들이 그나마 비슷비슷하고 누구를 만났을 때 직장, 학교, 사는 곳 이런 몇 가지의 질문만으로도 어떤 삶을 살아왔겠구나를 대충이나마 그려볼 수 있는 반면에 미국에서는, 특히나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다.
PwC에서도 그랬다.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커밍아웃과 이혼을 동시에 선언한 게이 파트너도 있었고, 오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지긋한 아저씨가 경력직으로 들어와 내 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종교의 이유로 가장 바쁜 시기에 주말에 일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고, 집이 너무 멀다며 당당하게 일주일에 이틀씩 재택근무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별의별 생각과 각자의 기준이 판을 친다. 물론 상식선의 지켜야 할 수준이 있지만 그 수준이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충격적이기도 하고, 또 그걸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과감하리만큼 관용적이다.
이곳의 직장 생활은 그렇기에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 늘 더 조심하기 위해 다들 노력하게 된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 전화를 할 때, 혹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모든 상황에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혹시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일이 아닌가 괜히 한번 더 신경 쓰게 된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꼭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무 선입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적응하기 힘든 가치관들이 적응되면서 미국의 직장 생활에 물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