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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아재 Aug 24. 2018

워라밸을 찾아서

미국에서 회계사로 살아가기 - #2 (부제: 가리어진 길)


회계 법인의 직장 생활은 끝없는 생존싸움이다. 강도 높은 업무는 반복되는 고통이며 진절머리 나는 사내 정치에 휩싸이기도 하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야 한다. 생존싸움은 맞는데 약육강식이 아닌 적자생존에 가깝다.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법인에서 도대체 왜, 어떻게 버티는 걸까.




#회계사의 업무


회계법인에서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


한국도 비슷하겠지만 미국 회계펌의 업무는 크게 감사(Audit), 세무(Tax), 컨설팅(Advisory) 세 분야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회계사들이 가장 많은 일이 몰려있는 감사와 세무 분야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문어발 같이 팀이 나눠지고 같은 감사, 같은 세무에서도 서로 다른 팀의 업무를 자세히는 알지 못할 만큼 그 안에서 하는 일이 또다시 나뉜다. 나는 세무 업무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데 PwC에서 처음 2년 동안은 부동산(Real Estate) 펀드와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을 대상으로 세무 보고와 세무 조정 업무 등을 하다가 팀을 옮겨 이후 3년간은 고액 순자산 보유자 고객들을 대상으로 세금 보고, 절세 전략, 증여세 및 유산 상속세 등에 관한 컨설팅 업무를 주로 보았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모 펀드(Private Equity)에서는 해외 개인/기관 투자자들 관련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및 해외 금융계좌 신고법(FATCA)과 OECD가 마련한 공통보고기준(Common Reporting Standard)에 관련된 모든 보고 업무를 주로 맡아서 하고 있다. (용어만 복잡하게 만들어 놔서 무슨 말인지 몰라도 상관은 없다.)


회계사를 목표로 하면서 택스 업무를 전문으로 하겠다고 선택한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지원과 면접 단계에서부터 나눠서 뽑기 때문인데 입사 후에 업무 관련해서는 소위 말하는 짬밥이 좀 많이 생길 때까지는 결정권이 없다시피 했다. PwC에서는 입사와 동시에 신입사원들을 필요에 따라 입맛대로 각종 팀에 배정시켰는데, 실력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었고 학벌로 나뉘는 것도 아니었으니 돌이켜보면 이건 완전히 복불복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하지만 변호사로 들어온 친구들은 예외로 조금 더 전문성을 띄는 팀을 주로 배정받았다.) 물론 많은 회사들이 신입사원들의 부서 배정을 이런 식으로 하겠지만, 나름 전문직이라는 회계사의 팀 배정을 본인의 희망사항과 관계없이 뭔가 주먹구구식으로 나눈다는 느낌이 들어서 씁쓸했다. 왜냐 하면 많은 회계사들이 법인에서 처음 배정해 준 팀에서 배운 일을 가지고 앞으로의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선택권을 주었다고 해도 아마 정확히 뭘 해야 할지 몰랐겠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을 했다는 책임감은 있지 않았을까. 거진 십 년을 일해온 지금에 와서는 어떤 분야에서 어떤 업무, 어떤 팀이 전망이 좋고, 배울 점이 많은지, 어디가 언제 일이 힘든지 또 덜 힘든지를 비교적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커리어가 결정되는 것이 많은 부분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울 때도 있다.


사실 회계사라는 하나의 직업이 다루는 업무가 너무나 많아서 짧은 글에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심지어 감사와 세무에서 일하는 것의 차이는 서로 다른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감사업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아는 것이 미비하고 마찬가지로 감사 업무를 하는 친구는 세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자신의 직업을 소개해야 할 자리에서는 둘 다 똑같이 회계사라고 하는데 막상 겹치는 실무 지식이 거의 없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아참, 분야에 관계없이 법인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룰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어느 부서, 어느 팀에 있건 바쁜 시즌에 일을 죽어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무 업무를 하게 되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IRS (국세청)를 상대하는 일이다.




#빌러블 아워(Billable hour)


생전 들어본 일도 써 볼일도 없던 이 단어가 그렇게 까지 싫어질 줄이야.


빌러블은 입사 첫날부터 퇴사하는 날까지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는 정말 지긋지긋한 단어였다.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 용어인데, 챠져블(chargeable) 아워고도 불리며 말 그대로 고객에게 청구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회계법인의 경우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공하는 회계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 내는 구조이므로 일을 할 때마다 팀원들이 일한 시간을 시스템에 기입해서 나중에 클라이언트(Client)들에게 청구해야만 한다. 처음 예상했던 예산과 비교하여 시간을 얼마나 썼느냐, 그 시간을 실제로 다 청구하느냐 마느냐를 분석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직책이 올라가면서 점점 더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 빌링(billing) 분석작업은 꽤나 많은 두통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예산에서 많이 오버되는 시간이 사용된 경우 그 시간을 어찌할 것인지를 팀의 두목 격인 파트너들에게 보고 되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파트너마다 각자 목표치가 있고, 파트너를 평가하는 메트릭스(Metrics)에 좋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지로 압력을 밑에 있는 팀원들에게 주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시간을 투자하고도 위에서 쓴소리가 듣기 싫어 그 시간을 기입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 회계펌에서는 '시간을 먹는다'라고 표현한다. (Fun fact - 회계 법인에서 매일같이 강조하는 것이 항상 'Do not eat your time' 바로 시간을 먹지 말고 다 청구해 넣으라는 것이었는데 현실은 이상과는 괴리감이 좀 있었다.)

빌링 아워와 연결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일의 효율성인 유틸라이제이션 (Utilization)이다. 나는 이 유틸라이제이션 때문에 PwC에 재직하는 내내 고통을 받았다. 보통 1년의 타깃이 팀별로 다르지만, 일이 많은 시즌에는 120%-200%까지도 올라가고 일이 없을 때는 30%-40%까지도 떨어져서 1년 동안 그 밸런스를 찾아 타깃을 맞추는 게 매우 중요했다. 만약 1년 동안의 타깃이 80%라면 하루에 8시간이 업무 시간으로 주어진다고 했을 때 1년 평균으로 최소 6-7시간은 클라이언트 관련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유틸라이제이션이 주는 고통은 팀마다 천차만별이긴 하나, 프로젝트가 작은 것이 많은 팀일수록 주기적으로 윗사람들과 이걸 맞추기 위해 원하던 원치 않던 상담 해야 했고, 가끔 몇 시간 농땡이를 부린다거나, 프로젝트에 남은 버짓이 없을 때, 그리고 열심히 일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빵구난 시간이 있을 때는 '시간을 도대체 어디에다 청구해야 하지?' 하는 과제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종종 있었다. 안타깝게도,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동안은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빌링과 유틸라이제이션이다.




#공인회계사(CPA)

입사와 동시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CPA시험을 봐야 했다. 회사에서 재촉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커리어에서 가장 열정이 충만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는 빨리 시험을 해치워버리고 정식으로 회계사가 되겠다는 야심 찬 나만의 계획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고통이지만, 업무가 바쁜 시즌에는 일을 하며 틈틈이 시험공부를 하는 게 정말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험날짜는 잡혀 있는데 일이 바쁜 날은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면 드러눕고 싶고, 그러다 잠들기 일쑤였다. 공부해야 하는 양 또한 방대해서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엄청난 마인드 컨트롤과 동기부여를 해야만 통과하는 쾌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만약 중간에 어떤 과목을 자칫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져서 18개월의 시험 보는 기간을 다 갉아먹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험을 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주어지는 업무가 점점 더 많아져서 시간이 갈수록 공부를 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를 동료들 사이에서 진짜 숱하게 보았다. (Fun fact - 미국의 회계사 시험은 네 과목으로 나눠진 시험을 일정 기간(18개월) 안에만 전부 통과하면 되기에 시험 자체가 갖는 난이도의 장벽은 난이도 자체도 준 고시급이라는 한국 회계사 시험에 비해 더 낮다고 볼 수 있지만, 일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기에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한국은 취업을 하기 전에 고시 공부처럼 몰아쳐서 공부해 회계사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야 면접을 통해 회계법인에 입사하는 구조인데 반해 미국은 상당히 실무 위주로 먼저 회계법인에 졸업 후 바로 입사를 한 뒤에 회사를 다니면서 회계사 시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에서 회계사를 계획하는 많은 한국인 취준생들이 잘 모르고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점인데, 졸업하면서 취업을 준비하지 않고 CPA 시험을 패스하기 위해 공부에만 몰두하는 경우이다. 앞뒤가 바뀐 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험을 먼저 패스한다는 자체로는 당연히 손해가 아니긴 하나 딱히 시험에 패스했다고 해서 큰 가산점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졸업을 일단 하게 되면 취업시장에서 엄청 불리해진다.) 그리고 웬만한 미국 회계 법인들은 시험 신청비용부터, 각종 수업 교제비, 시험 합격 시 추가 보너스, 합격 후 자격증 비용 등을 전부 지원하기에 회사에 들어가서 실무를 쌓으면서 시험을 보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다.

미국의 경우 일단 시험을 보기 위한 응시 조건이 주마다 다르고 몇 년마다 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캘리포니아의 경우 학사 학위와 더불어 150 크레디트 이상의 수업 유닛, 24 유닛 이상의 회계 수업과 24 유닛 이상의 경제/경영 관련 수업을 들어야만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 지므로 꽤 까다로운 편이다. (대학교 때 상경계열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업을 따로 들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기 전에 미국 회계법인에서 면접 시에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 중의 하나가 CPA시험을 볼 수 있는 과목 수를 졸업 전까지 채울 수 있느냐 이기도 하다. 한국에 살면서 미국 회계사 시험을 스펙 쌓기용으로 괌이나 하와이에서 패스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사실 실무 경험이 없다면 자격증을 받지 못하므로, 단순히 시험만 패스한 경우에는 미국 공인회계사라고 칭할 수는 없다. (Fun fact -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편의상 미국 공인 회계 혹은 시험 자체를 AICPA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사실 AICPA는 American Institute of Certified Public Accountants의 약자로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를 담당하는 기관을 말하는 이름이므로 굉장히 잘못된 호칭이다. 굳이 한국에서 미국 회계사에 호칭을 붙이자면 USCPA가 좀 더 맞는 표현이다.)



회계법인으로의 취업은 학교의 커리어 페어(Career Fair)와 캠퍼스 리크루팅(Campus Recruiting)을 통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인사고과와 승진


어디에서든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미국과 한국을 떠나서 해당되는 진리인데 신입사원 때 가장 크리티컬 한 것이 아마도 처음 3개월 정도의 기간일 것이다. 이때 쌓는 이미지가 몇 년 이상도 갈 수 있다 보면 된다. 처음에 일을 열심히 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모이면, 후에 조금 게으른 모습을 보여도 '뭔가 일이 있겠지.' '알아서 잘 하는 친구니까.'라고 받아들여지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처음에 첫인상이 좋지 않으면 그걸 뒤집는 데에는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처음 몇 달의 업무 능력과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 


나는 PwC에 있을 때 사내 정치력이 제로였다 (지금도 거리가 멀다). 회사 내에서 누군가에게 알랑방귀를 뀔 만큼 넉살 좋은 성격도 아니거니와, 미국의 독특한 문화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스몰 토크(small talk)에 너무너무 약했다. 스몰 토크란 말 그대로 작은 얘기 또는 사소한 잡담들을 말하는 것인데, 미국은 누구를 만났을 때 날씨 하나만 가지고도 10분 넘게 떠들 만큼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것이 굉장히 당연할 정도의 문화이고 어찌 보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나마 나는 반갑게 누군가와 인사를 한다거나,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잘 듣고 맞장구는 잘 추었는데,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좀 부족했다. 정치력이 없으니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저 업무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매년 업무 평가를 할 때면 나오는 나의 약점이 팀에서의 가시성 (Visibility)이었다. 팀 내에서 활동반경이 적고 너무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의 커리어 코치였던 디렉터(회계펌의 부장급) J 씨의 말로는 나하고 일단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되면 다들 좋아하는데, 나와 일을 하지 않은 윗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씁쓸했다. 그때부터 J 씨의 조언대로 아침마다 괜히 어슬렁 거리며 이 사람 저 사람 책상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평소에 말을 잘 나누지 않던 사람들과도 먼저 다가가서 얘기하려 노력하고 반강제적으로 앞장서서 팀의 이벤트나 트레이닝을 리드하기도 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PwC에 있을 때 처음 혼란이 왔던 점이 있는데 바로 승진 문화였다. 재미있는 것이 미국의 회계펌에서는 승진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미리 적게는 4-5개월에서 길게는 1년 전에 '내가 승진을 하고 싶소'라고 커리어 코치에게 얘기를 해야 했다. (물론 회계펌에 국한되는 얘기일 수 있다.) 그 후 위에서 판단하기에 테스트할 가치가 있다고 보이면 Acting이라는 표현을 써서 일정 기간 동안 그다음 단계 직책의 일을 주어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평가한 뒤 성공적이라고 판단되면 승진을 시켜주는 방식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본인 주도적인 방식이었는데 사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난 회사에서 일을 그저 열심히 하고 계속 연차가 쌓이면 승진은 때가 되면 알아서 일어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었다. 미국의 직장은 굉장히 본인 주도적이고, 어찌 보면 회사에서 평가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신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냐이다. 모르는 것도 조금 아는 체하기도 하고 작은 일을 해놓고 큰일인 양 허세도 부릴 줄 알면 좋다. 겸손이 미덕인 한국사회와는 시작점부터가 다르다. PwC에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인사고과 때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PFF(Periodic Feedback Form)란 것을 작성해야 했는데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일 년 동안의 성과를 평가해서 제출하는 것으로 보통 500자에서 1000자 정도를 써서 내야 했는데 처음엔 나 자신을 스스로 평가해서 어필한다는 문화에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졌었다.

미국에서도 절대적인 룰있는데, 바로 일은 잘하고 봐야 한다 라는 것이다. 미국 회사들은 일단 자기들이 뽑아놓은 사람에 대해서는 신뢰를 갖고 함부로 나쁘게 판단하지 않는 나름의 윤리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대신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때의 결과는 가혹하다. 한국처럼 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아니고 철저한 개인주의와 성과 위주이므로 때로는 좀 딱딱한 느낌도 있다. 면전에 대고는 절대 싫은 소리를 안 하고 웃으며 대하다가도 업무 실력에 따라 인사고과에서 만큼은 차갑게 평가하기에 뒤통수 맞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찾아서


떠날 때는 쿨하게


나는 5년 반의 시간을 뒤로 사표를 던졌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복이 너무 힘들었다. PwC에서의 마지막 1년은 어찌 보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신입 때의 열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비지 시즌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무렵 매일 생각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여기서 계속 버티는 걸까.


사실 처음부터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1-2년간은 CPA시험을 보고 또 신입으로서 일을 배우느라고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어찌 보면 가장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재밌고 보람 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어떤 계기로 인해 처음 있던 팀에 자괴감을 느껴 우여곡절 끝에 팀을 옮겼고 그 때문에 1년은 새로운 팀원들과 다시 신뢰를 쌓기 위한 노력에 소모되었고, 직후 시니어(Senior Associate)로 승진한 뒤엔 끝없는 업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회계법인에서 턴오버(Turnover: 원래 있던 사람이 그만두고 그 자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가 가장 심한 직책이 바로 시니어인데 위로는 매니저에게 보고해야 하고 아래로는 어쏘(Associate)들을 가르치고 관리해야 하므로 중간에 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일쑤였다. 비지 시즌이 되면 주당 60시간 일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장 바쁜 데드라인 전 3주 정도는 70-80시간도 우습게 일했다. 일 중독처럼 일하는 몇몇 동료들은 100시간씩 일하기도 했다. 몇몇 친한 동료들끼리 PwC는 'PricewaterhouseCoopers'의 약자가 아니라 'People Working Constantly'의 약자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비지 시즌이 있는 몇 달 동안은 매일 밤 자정, 새벽 한두 시에 빨래처럼 택시 안에 널브러져 퇴근, 집에 와서 기절하고 눈뜨면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는데, 몇 년을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몸에 이상이 왔다. 목과 어깨, 그리고 팔이 점점 이유를 모르게 아프고 저리기 시작했고, 나는 회사에 치료를 위해 한 달을 쉬겠다고 얘기했다.


목디스크의 증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여러 가지 노력에 들어갔다. 병원을 다니며 목 뒤에 무지막지한 주사를 맞고 도수치료와 물리치료, 한의원 등 사실 돈도 많이 깨졌다. 나는 앉는 자세가 학생 때부터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부분에서는 나 스스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한 시간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한쪽 팔에만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마우스는 양쪽 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의자를 허리가 좀 더 교정되는 의자로 바꿔주고 전문 자세교정사까지 불러주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기도 했는데 한번 아프기 시작하니까 낫기가 쉽지 않았다. 바쁘지 않을 때는 괜찮다가도 일을 많이 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다시 목이 아팠다. 평소에 조심하고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 그때 정말 뼈아프게 와 닿았다. 그렇게 몸을 좀 더 돌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퇴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회계법인에서 파트너가 되는 것은 또한 부의 축적으로 향함을 의미한다. (보통 신입 연봉의 7-8배 이상이며 그 위로의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하다.)




대형 회계법인의 구조는 피라미드 식이다. 여느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임원(파트너)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5년이 넘게 근무하면서 토종 외국인으로서 파트너가 된 사람을 딱 1명 보았는데 중국인으로서 중국 고객들을 끌어와서 파트너가 된 경우였으므로 케이스가 달랐다. 결국엔 올라갈수록 영업이다. 고객을 따내고 일을 끌어와야 한다. 가능성의 측면을 따져 보았을 때 파트너가 되는 일은 엄청난 고객 관리와 입 터는 스킬이 필요한 일로 미국인에게도 어려운 일이기에,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외국인 출신으로 미국에 있는 한국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 아닌 이상 파트너가 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솔직히 내가 무엇보다 가장 큰 괴리감이 느껴졌던 것은, 상식적으로 한 조직에서 승진을 하고 올라가게 되면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시니어의 눈으로 바라본 매니저와 디렉터의 삶은 업무량이나 스트레스 레벨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물론 돈이야 더 많이 받지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빡빡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더 이상 이건 아니겠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다. 


학생 때는 빅포만이 회계사의 꽃이며 회계사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와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길은 무수히 많다. 경험을 쌓은 뒤 스스로 개업을 한다거나 일반 회사의 재무팀, 회계팀으로 간다거나 정부기관으로 취업할 수도 있고, 은행, 증권사, 보험사, 자산운용사, 연구소, 각종 공기업 등 매우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이 처음엔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빅포나 그 밖의 회계법인을 거쳐가는 경험이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많은 회사들이 사내 회계사를 선임할 때 빅포 출신을 선호하기에 커리어를 시작하기에는 좋은 곳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Fun fact - 회계 법인 중에 세계에서 가장 큰 4개의 초대형 회계 법인을 빅포(Big 4)라고 일컫는데 PwC, Deloitte, EY, 그리고 KPMG이다. 한국에는 순서대로 삼일, 안진, 한영, 삼정회계법인으로 들어가 있다.)


PwC를 나와 사모 펀드의 재무 팀으로 옮기고 나서 내 삶은 확실히 여유로워졌다. 반복에 지치지 않는 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도전 과제로 남겠지만 야근도 많이 없고 주말에 일을 하는 일도 거의 없다. 또 지긋지긋한 빌링과 버짓, 유틸리제이션에 시달릴 일도 더 이상 없다. 다행히 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만족하며 일을 하고 있다. 일에 치여 앞만 보다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어떤 커리어를 갖고 어떤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지 까먹기 쉽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아프면서 배운 뼈저린 교훈이다. 누구나 처음의 열정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일상에 지쳐 살아가다 보면 그게 참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PwC에서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에 내 커리어 코치였던 디렉터 J 씨가 나에게 해 주었던 꽤나 솔직한 얘기가 문득 기억이 난다.


"여긴 누구나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니야. 그래도 어떤 일이 주어지던지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많이 배워. 그리고 난 네가 내 밑에 있는 한 최대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그리고 그렇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의 길이 어디인지 보이게 될 거야."


그리고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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