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네 상담사 Nov 23. 2021

상담사 대학원생의 집단상담 2편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ggulsim/52


#3. 2일차 오후 장: 나도 얘기했는데 나는 어떤지 왜 안물어봐? 



집단상담에서 내 작업을 하던 와중에, 다른 집단원 A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사연을 꺼내놓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A의 작업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되어 리더는 A의 기분을 묻고, A의 얘기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느낌도 함께 물어보았다.


그리고 집단을 마칠 시간이 되어 한 사람씩 소감을 말하고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도비: 리더, 나 질문이 있는데, 왜 내 기분은 어떤지 안물어봤어? 


리더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리더: 도비 기분이 어떤데? 


이 아지매 얼렁뚱땅 넘어가시려고 하네, 라고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났다. 

도비: 아씨! 왜 아까 안물어봤냐고오, 나도 내 얘기했잖아!! 


> 집단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내 얘기를 마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말이다. 갈 길 없는 내 감정은 아직 추슬러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흔하지 않았던 건 내가 이 사실을 굳이 짚고 넘어간 거다. 굳이 질문을 해서 내 작업을 왜 대충하고 넘어갔냐고 물어본거다.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너절해보이지만, 난 내 감정이 소중하고,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하다고 떼쟁이처럼 표현해본거다. 참고, 양보하고, 감정을 삼키는게 익숙했던 내가 그러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잘 참고 아무렇지 않아하는 걸 보며 상처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셨다. 힘들다고 무너진 우리 언니만 그렇게 약하게 보셨지, 남몰래 나도 피눈물을 흘려온 것을 보지 않았으니 믿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티나게 아파하는 언니만 엄마가 신경써줬던 것도 리더의 행동이 퍽 서운했던 이유였다. 내 얘기 하는 시간에 다른 집단원 얘기에 홀랑 정신이 팔려 나를 잊은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다음 날 아침, 


도비: 어제 나 그렇게 말한거, 되게 큰 도전이었어. 왜 내 감정 안물어봤냐고 한 거 말야. 


리더: 자기 밥그릇 챙기는 자식이 제일 예쁘지. 내가 전문가라면 마땅히 놓치지 않고 물어봤어야 하는게 맞지. 


> 자신이 놓쳤다는 걸 인정한 거다. 그리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하신거고. 


도비: 흥, 귀엽다는 말도 듣고 예쁘다는 말도 들었으니 이번 집단은 아주 수확이 좋아. 




#4 삶은 포도(Boiled grape)*


* 삶은 계란(Life is an egg) 말장난의 오마주


둘째날 집단에서의 화두는, 삶에서 운명처럼 다가오는 비극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것이었다. 


집단이 끝나고 나는 장을 보고, 씻고 책을 읽고, 그리고 좋아하는 켐벨 포도를 먹었다. 

10월 말이니 켐벨 포도는 철이 아니어서 먹다보면 상한 포도알도 드문드문 나왔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딱 씹으면 그 시큼하고 불쾌한 맛이 나서 입맛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도를 안 먹을 순 없었다. 나는 포도를 사랑하니까. 


삶이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포도를 먹기 위해서는 상한 포도알을 맛볼 위험을 감수하는 거라고. 얄롬이 이번 가을 한국 임상학회에 와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린 장미를 얻기 위해 가시에 찔릴 가능성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고. 삶의 황홀한 순간들, 행복감, 즐거움, 감동, 경이.. 그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상한 포도알 처럼 느껴지는 슬픔, 고통, 절망까지 같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한 포도알이 싫다며 포도를 더 이상 먹지 않는다면.. 그 좋아하는 새콤한 포도도 함께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슬프지 않기 위해 삶에서 거리를 둔다면, 기쁨과도 함께 거리를 두게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무미건조해지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울었다. 나는 포도를 너무 좋아하는데, 상한 포도는 너무 싫어. 근데 난 또 포도를 계속 먹겠지. 앞으로도 힘든 날들이 있겠지. 그렇다고 이 삶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그게 슬퍼 울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 너 요새 그런거 읽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