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마음 한 켠에 항상 ‘사람들은 날 좋아할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믿음이 깨질 때 그녀는 많이 고통스러워했고 흔들렸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순진한 믿음이 그녀를 피해자 자리에 앉혀 놓는 주범이었다.
여자는 이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몇 가지 전제를 세워봤다. 우선 양육환경을 살펴보면, 체벌과 방임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여자는 부모님이 체벌을 해도, 방임을 해도 ‘나를 사랑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까, 그래야 사는 게 덜 두려울 테니 말이다. 이렇게 아동기를 보내다가 청소년기에 친구를 만나면서 서로에게 잘해준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서로를 아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깨닫게 해준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러면서 가족이 지금까지 준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믿음이 수정된 것이다. ‘사람들은 날 좋아할거야, 가족들 빼고’라고 말이다. 일종의 예외 조항이었다. 하지만 겉으론 잘해줘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걸 파악하는 눈치가 없었다. 사람을 의심하는 센서가 망가진 것처럼 살았다.
두 번째 전제는 성인기에 집단상담을 자주 다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녀는 1000시간이 넘는 시간을 집단상담에서 보냈다. 집단의 흐름은 결국 모두가 모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여자는 상담자와 집단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 익숙했다. 이상적인 집단에서의 환경이 집단 밖에서도 유지되었다 할 수 있다.
마지막 전제는 조금 초월적인데, 영성적인 사람이어서 그렇다는 게 그 이유다. 천주교와 불교를 믿는 여자는 세상은 사랑이고 자비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자가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면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찰 거라고 하느님과 부처님은 말하고 있었다. 여자에겐 두 종교가 충돌하지 않았다. 여자는 부처님처럼 마음을 닦고 예수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려 했기에 남들도 나를 사랑하리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제 여자는 지레짐작하지 않기로 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험한 느낌이 들 때는 한 번씩 의심해보기로. 촘촘한 체에 걸러 맑고 깨끗한 사람만 곁에 두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여자를 피해자로 만들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결론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