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백(원작: 동백꽃, 작가 김유정)
오늘도 또 나는 막 쪼키었다. (*쪼이다의 강한 의미)
내가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화장실로 향하려니까 등 뒤에서 "이야압!", "끼야아!" 하고 애들 악다구니 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두 놈이 또 엉켜 싸우고 있었다.
옆 반의 점순이가 덩치도 작은 우리 반 민혁이를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퍼퍼퍽하고 원투 펀치를 날리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스텝을 밟으며 뺨따귀를 날린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때려눕힌다.
그러면 이 안타까운 친구는 맞을 적마다 입으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입술을 또 얻어맞으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지곤 한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속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것 같이 분노하는 마음이 끓곤 한다.
대뜸 교실 빗자루를 들고 달려들어 점순이를 혼내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바짝바짝 민혁이 기를 올리고 그랬음이 틀림없다.
요새 왜 나랑 민혁이를 못 잡아먹어 난리이고 그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슬라임 사건만 하더라도 나는 점순이에게 조금도 잘못한 건은 없다.
여자애가 공부를 하러 가면 갔지 남 반 앞에서 난동을 부릴 것은 또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공부하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나와 저 아이는 이야기도 잘 안 하고, 서로 만나도 본 척만 하고 이렇게 "젊잔하게", 아니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하물며 망아지만 한 여자 아이가 남 공부하는 것을 보구.
"그럼 혼자 하지 떼로 하냐, 공부를?"
내가 이렇게 내뱉는 소리를 하니까,
"너 공부하기 좋니?"
또는,
"시험 기간이나 되거든 하지 벌써 공부를 하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웃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 놈이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언제 개봉했는지 독한 냄새가 풍기는 액체 괴물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엔 이거 없지?"하고 생색 있는 큰 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만져보랜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팔레트 슬라임이 말랑말랑하단다."
"난 슬라임 안 만진다. 너나 갖고 놀아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슬라임을 도로 쑥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동네에 들어온 것은 근 이 년째 되어 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망울에 눈물까지 맺히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슬라임 통을 다시 집어 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디어질 듯 자빠질 듯 복도로 휑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우리 반 선생님이
"점순아, 얼른 모둠 토의 참여해야지?" 하고 웃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할 건데요?"
이렇게 건방지게 받아치는 점순이였다.
본시 부끄러움을 아는 애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녀석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등을 슬라임 통으로 한번 모질게 후려치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그 고약한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고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령 주는 슬라임을 안 갖고 논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집엔 이거 없지?"는 또 뭐냐.
그런데 이놈이 까닭 없이 기를 복복 쓰며 나를 말려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어디서 누가 죽는소리를 낸다.
이거 어디 반에서 애를 잡나 하고 우리 반 교실로 들어오다가 나는 고만 두 눈이 뚱그레졌다.
점순이가 옆 반 교탁에 홀로 걸터앉았는데 아 이게 치마 앞에다 민혁이를 꼭 붙들어 놓고는,
"이놈의 시키! 죽어라, 죽어라."
이렇게 암팡스레 패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머리나 치면 모르겠다마는 아주 아파보라고 그 볼기짝께를 주먹으로 콕콕 쥐어박는 것이다.
내 절친 민혁이를 괴롭히는 것에, 쌍심지가 오르고 사지가 부르르 떨렸으나
사방을 한번 휘둘러보고야 그제야 교실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잡은 참빗자루를 들어 교실 뒷문을 후려치며,
"이놈의 시키! 내 친구 울리려고 그러니?"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점순이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고 그대로 의젓이 앉아서 제 슬라임 갖고 놀듯이
또 죽어라, 죽어라 하고 패는 것이다.
이걸 보면 내가 반에 올 때를 겨냥해 가지고 미리부터 민혁이를 잡아 가지고 있다가
네 보라는 듯이 내 앞에서 줴지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옆 반에서 여자애 하고 싸움판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편이 썩 불리함을 알았다.
그래 민혁이가 맞을 적마다 빗자루로 교실 문을 후려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교실 문을 칠수록 선생님이 듣고 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허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랑 민혁이만 밑지는 노릇이다.
"아, 박점순. 남의 친구 아주 죽일 셈이야?"
내가 도끼눈을 뜨고 다시 꽥 호령을 하니까 그제야 뒷문 쪽으로 쪼르르 오더니, 교실 밖에 서 있는 나의 머리를 쏘아보며 민혁이를 내팽개친다.
"에이, 더럽다! 더럽다!"
"더러운 걸 누가 너보고 지금까지 끼고 있으랬니? 이런 망할!"
하고 나도 더럽단 듯이 교실을 휑하고 돌아 나왔다.
민혁이의 얼굴을 본다면 골병은 단단히 든 듯싶다.
그리고 나의 등 뒤를 향하여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야, 이 바보 녀석아!"
"얘! 너 병X이지?"
그만해도 좋으련만,
"얘! 부모님은 잘 살아계시니?"
욕을 이토록 먹어 가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걸 분하게 여기다가 급기야는 두 눈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래서 "이 개XX야!"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 나왔다.
다음 날, 교실로 와보니 담임 선생님과 학교폭력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순이가 나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했단다.
같이 놀자고 해도 내가 안 놀아주고, 따돌림을 시켰으며, "개XX야!"라고 욕을 한 것이 문제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 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교실에서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듣자 하니 신고자가 신고만 하면 아무 가해사실이 없어도 쫓겨나야 한단다.
최근에는 즉시분리 기간이 7일로 연장됐단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운동장에서 한동안 울고 있다 보니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터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봐라. 학교폭력 대책심의위원회까지 끌고 가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만들어줄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욕설 녹음본은 염려 마라. 내 유포 안 할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돈 백 원 짜리 좀 있냐"
하고는 손을 내민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줬더니
"너 말 마라!"
"그래!"
"이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란다!"
라고 떠든다.
조금 있더니 학교 후문에서
"점순아! 점순아! 학교폭력이나 당하고 어딜 갔어! 나쁜 가해자 놈, 내가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지."
하고 어딜(변호사 사무실이나 경찰서 두 곳 중 하나일 테다) 갔다 온 듯싶은 그의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학교 중앙 현관을 지나간 다음
나는 운동장 구령대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교실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