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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구멍 Aug 27. 2023

다음 생에서 기다릴게

<패스트 라이브즈> 뉴욕의 이방인이 들려주는 전생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 

There is a word in Korean. In-Yun. It means "providence." Or... "fate".

But it's specifically about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한국에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어요.

“하늘의 뜻” 혹은 “운명”으로 이어진 만남이라는 뜻이죠.

I think it comes from... Buddhism. And... reincarnation.

It's an "in-yun" if two strangers even walk by each other in the street and their clothes accidentally brush.

불교의 윤회사상에서 유래된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흔히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말해요.

Because... it means there must have been something between them in their past lives.

아주 사소한 만남조차 전생에서 수없이 거듭된 인연에서 비롯된 거라고 믿거든요.

If two people get married...

they say it's because there have been 8000 layers in-yun.

Over 8000 lifetimes.     

만약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건 전생에 자그마치 8000겁의 인연으로 엮어있기 때문에

결국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진 거래요. 

 - 영화 속 노라의 대사 중에서


  만약 처음 만난 누군가가 나에게 저런 식으로 전생과 인연에 관해 운운했다면 영화 속 노라의 대사처럼 흔해 빠진 작업용 멘트일 뿐이라고 핀잔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는 뉴욕의 이방인이고 그녀의 한국말이 “많이 녹슨” 이유가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직 잠꼬대를 하는 동안에만 한국말을 쓰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면?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 그녀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그녀의 이름은 셀린 송. 초등학교 때 한국을 떠난 한국계 캐나다 이민 1.5세대이자 영화 <넘버3>를 연출했던 송능한 감독의 딸이라고 한다. 두 번의 이민을 거쳐 뉴욕에 정착한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희곡작법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연극무대에서 극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시나리오 <패스트 라이브즈>로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인연과 전생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화법으로 풀어낸 <패스트 라이브즈>는 선댄스와 베를린 영화제의 극찬에 이어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일찍이 한국 이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로 연극무대에서 주목받으며 단단한 내공을 쌓았다는 그녀는 여간해서는 쉽게 공감하기 힘든 복잡미묘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체험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놀라운 마법을 부린다. 예를 들어 지난 삶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만 했던 이민자에게 전생과 인연의 의미가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그런 한국인 아내 곁에서 그녀가 24년 만에 재회한 소꿉친구와 아슬아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야 하는 유대인 남편의 심정 같은 것들. 그런 감정들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으로 공감하기는 어렵고 힘든 법인데 그 어려운 일을 그녀는 해낸다. 심지어 그 흔한 감정의 기복도 없이 내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자, 이제 당신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배우들의 서툰 한국어 대사들이 귀에 거슬리고 다분히 연극적인 문법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조금만 더 마음의 문을 열고 나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라와 해성이 우버를 기다리는 2분의 짧은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주 길게 설계된 연극무대를 걸어가듯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노라의 모습을 쫓아가는 카메라의 롱테이크를 따라가다가 그녀가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을 최고의 라스트씬ㅇ로 손꼽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 영화를 알게 된 것 역시 당신과 내가 이 영화와 전생에 몇 천 겁의 인연으로 엮어있기 때문이라면 부디 다음 생에는 노라와 해성이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볼 수 있게 되기를.   


P.S.       

If you get caught between the Moon and New York City

The best that you can do is fall in love

만약 당신이 뉴욕과 달빛 사이에서 발목을 잡힌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사랑에 빠지는 것 뿐이랍니다

 - Arthur's Theme (Best That You Can Do) 중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저 감미로운 러브송을 시작으로 킹콩이 목숨을 걸고 매달렸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폴 오스터의 소설 속 눈부신 문장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누들스가 데보라를 훔쳐보던 뒷골목과 브루클린 브릿지까지. 어린 시절 나를 매혹했던 것들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내가 꿈꾸는 이야기들이 모두 현실이 되고, 아무리 유치하고 흔해 빠진 얘기도 세상에서 가장 쿨한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는 마법의 도시. <패스트 라이브즈>로 인해 뉴욕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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