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리뷰
갑자기 삶이 허망해지는 순간이 있다. 갑자기 소중한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의 황망함이라던가, 오랜 시간 목표로 해온 꿈이 예상치 못한 외적변수로 무너져 내렸을 때, 큰 목표는 아니더라도 쉼 없이 달려왔는데 결국 남은 것 하나 없을 때. 일상 속 이런 결과를 맞닥뜨릴 때 우린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삶에 허망함과 공허를 느낀다. 반대로 누군가는 겉으로는 부와 명예를 가진 성공한 사람인데 본인 스스로는 삶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다. 부와 명예를 쌓기까지 노력했던 시간들이 모래성처럼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터. 이 모두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무엇이 문제였지, 왜 내 삶은 이런 거지’ 하고 말이다.
근데 이 계기에 따른 행동마저 사실은 잘못됐다. 왜냐고? 삶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그냥 본인이 아무리 과거에 애써봤자 벌어졌어야만 하는 일이 그냥 벌어진 것뿐이다. 애초에 방향이 잘못됐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가 없다. 삶의 파고에 있어 변하는 본인의 감정기복에 따라 모든 생각이 좌우될 뿐. 성공의 척도를 가려낼 이유가 없다. 그저 한 사람의 인생만 존재할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브래드는 미국 중산층의 중년남성이다.대개 모든 중년의 삶이 그렇듯, 평범한 일상 속 문득 허무와 공허가 그를 감싼다. 이 허무와 공허는 열패감이 원인이다. SNS를 통해 비친 주변인들의 성공을 보며 본인 인생을 그 안에 투영하기 시작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본인은 잘난 것 하나 없다.성공한 사업가에 교수를 하며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친구, 이미 은퇴하고 섬에서 걱정 없는 삶을 보내는 친구들을 보며 본인은 가진 건 가족뿐. 똑똑한 아들 트로이를 아이비리그 음대에 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열패감이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아들의 인생에 본인의 욕심을 투영한다.
근데 문제가 터졌다. 아들 트로이가 면접날짜를 착각해 면접을 보지 못한 것. 브레드는 꼴사납지만 어쩔 수 없이 성공한 사업가 친구 크레이그에게 부탁을 하게 되면서 식사자리를 갖는다. 비영리단체에서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그와, 잘 나가는 그의 근황에 더더욱 큰패배감이 깃든다. 근데 그에게 주위 잘 나갔던 친구들의 근황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처참하다. 아들이 희귀병이 걸렸고, 또 다른 친구는 사기꾼이 돼 도망을 다닌다.그리고는 집에 가면서 생각한다. 내겐 돈도 없고, 잘난 것 하나 없지만 똑똑한 아들과,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아내,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아주 약간의 돈이 있다고. 그리고 마지막에 침대에 누우며 말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감독 벤스틸러는 마치 이 영화를 의도적으로 한국인을타깃으로 만들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현대인의 현실고증을 러닝타임 내내 불편함 없이 구현한다. SNS에 미쳐 살며 누구는 돈을 많이 벌었고, 누구는 좋은 차, 좋은 집, 성공한 모습에 핸드폰 스크린 속 본인은 한없이 작아져가는 삶. 그게 잘못된지도 모르는 삶에 우리는 매 순간 찌들어있다. 나만 아는 내 바닥과 남들이 보여주는 꼭대기의 대화를 자기 전까지 되뇌다 잠에 든다. 타인을 생각할 땐 그의 하이라이트만을 기억한다.
근데 잘 생각해 보자. 누구는 전용기가 없다고 패배감에 지배당하고, 누구는 하루 2달러 저녁식사에도 행복해한다. 브레드의 침대에 누우며 마지막 대사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현대인의 편협한 사고에 대한 일침과 동시에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는 시선의 중요성을 변주한다. 좋은 직장에 취업해도 더 좋은 직장의 누군가와 연봉을 비교하고, 결혼을 하는 상대방의 자산을 저울질하는 현대인의 일상 뒤편엔 곪을 대로 곪아터진 우울이 자리한다. 웃는 가면을 쓰고 집에 돌아와 가면을 벗으면 그 몰골은 추악하고 형편없다. 남에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그 마음속에 악마가 자리한다면, 그 삶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평가 자체도 의미가 없다. 우린 남에게 값진 평가를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추켜세우거나 비하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어
이 영화의 명대사처럼 나를 추켜세우거나 비하하는 더많은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내 인생이 그 자체로 숭고하고 값지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적당한 경제력, 본인의 일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파생돼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 누가 성공했다고,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건 사실 본인에게 크게 중요하지않으며, 그렇게 깊게 생각할 만큼 타인은 내게 큰 관심이 없다. 차변과 대변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그 차이값만큼 우린 손해를 보고 있는 것.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하고 있는 것에 모든 겉치레를 걷어내고 명징하고 깊은 알맹이만 바라보면 온전히 그 자체가 소중해진다.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글 왜 쓰냐고. 돈도 안 되는 글을 왜 쓰냐고. 물론 여기 글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겠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부럽지도 않다. 그들은 수많은 선택지 중 그런 선택을 한 것뿐이니까. 한번 더 묻는다면 나난 그냥 행복해서 쓰는 거라 답하겠다. 비영리단체에서 돈도 안 되는 직업을 골라 새크라멘토로 간 브래드를 비아냥대는 크레이그에겐 명분이 없다. 영원히 그를 행복하게 해 줄 명분이 없다. 돈과 권력은 절대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때로는 ‘그냥’이 그 자체로 값진 의미를 지닌다. 왜 그 일을 하냐, 왜 사냐, 왜 그런 생각을 하냐라고 누가 물었을 때,
그냥. 그냥 좋으니까. 살다 보니 여기로 이끌려왔어
그게 정답인 거다. 내가 좋으니까. 내가 좋아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다. 현대인은 늘 그럴싸한 이유와 명분으로 본인의 행동과 가치관에 정당화를 부여한다. 그건 온전히 ‘타인이 바라보는 본인’을 의식한 답이다. 이 의식이 비교를 낳고, 비교가 습관이 될때 삶은 불행으로 치닫는다. 사실 중소기업에 다녀도, 월 이백만 원, 삼백만 원을 버는데 애 둘, 셋 낳아도,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도, 취업에 실패해도, 애인이 없어도, 서울에 살지 않아도, 그럴싸한 차와 집이 없어도,공부를 못해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도 인생 안 망하거든. 내 주변사람들과 나를 비교할 때 삶이 망하는 거다.인간은 심지어 간사해서 비교대상이 아닌 사람과는 애초에 비교자체를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정당화하는데 방해가 되거든. 손흥민과 대통령과 메시, 유명텔런트, 대기업 총수와 본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들에게 배팅을 하면서 스스로 자위한다. 그리곤 내 주변사람 대비 내가 몇 등인지를 비교하고 그 명목상 의미 없는 숫자에 희열을 느낀다.
도대체 얼만큼 가져야 납득하고 순응할까. 깨어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허상에 갇히는 건 순간이 아니라 평생이다. 얼마나 아까운가.
러닝타임이 끝나고 엔딩신이 올라갈 때쯤 영화는 말한다. 왜 조금 더 본인에게 솔직해지지 못하냐고. 오늘도 살아있음에, 그저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