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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는 개와 무는 개, 누가 나쁜가

영화 <플란다스의 개> 리뷰

by 홍그리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이자, 사회풍자의 절정에 치닫는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2000년대 소시민을 지켜내고자 하는 블랙코미디의 서막을 알린다.

영어로 플란다스의 개는 'Barking dogs never bite‘.로 풀이된다. 즉,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는 뜻.

누가 짖는 개이고, 누가 안 짖는 개인지 영화는 직설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관객들에게 보여줄 듯, 안 보여 줄듯 관객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하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의뭉스럽고, 사건전개의 모든 부분은 의문스럽다. 어디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리는 시퀀스는 원작 플란다스의 개와는 확실히 대조적인 모습을 띤다.

누구는 겉모습은 비열하고 누추한 악당 같지만 꽤 선량하고, 또 다른 누구는 겉모습은 정의로우나 뒤에선 꿍꿍이가 있다. 그런 대조적인 등장인물들 속에서 온갖 사회 비리를 직설적으로 풍자한다. 당시 2000년대의 건설비리, 남녀차별, 층간소음 그리고 반려문화정착의 과도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영화는 봉준호감독의 이후 20년 동안의 걸작들의 예고편 같다.

자, 우리가 원작 <플란다스의 개> 원래 줄거리를 떠올려보자.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다. 우유배달을 하던 네로가 길가에 쓰러져있는 파트라슈를 구출하고, 파트라슈는 네로의 할아버지가 쓰러진 뒤 네로와 함께우유배달을 다니는 이야기. 근데 여기서는 반대다. 개를 계속 죽인다.

주인공 윤주는 인문계 석사졸업장하나 들고 있고 가끔시간강사를 전전하는 백수다. 주변 사람들은 잘 나가고 아내는 본인을 대신해 임신상태에서 회사다닌다. 한편, 윤주는 아파트 강아지 소리가 시끄러워 한 강아지를 주워 지하실에 가둔다. 화풀이 대상을 찾은 셈이다. 근데 경비원아저씨는 지하실에서 보신탕 준비를 이미 마쳤다. 누가 죽였는지 영화는 밝히지 않는다.

윤주의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고, 아파트 내 할머니가 가진 치와와를 옥상에서 던져 또 죽인다. 2번째 살인을저지른 셈이다. 경비사무소 경리 현남은 이를 옥상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그를 쫓는데 결국 잡는데 실패한다. 이후, 아내가 퇴직금으로 산 강아지를 우연히 산책시키다 실제로 잃어버리면서 주인공 윤주는 본인이 강아지를 찾아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봉착한다. 자신이 매우 싫어하는 강아지를 스스로 찾아가며 스스로 비윤리적인 모습을 영화는 감추어간다. 현 기득권층에 대한 풍자를 이 플롯에 투영시킨다. 이후, 아파트 앞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보일러 이 씨가 이 개를 주워 먹으려는 걸 현남은 보기 좋게 윤주에게 찾아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윤주는 교수에게 뇌물을 줘 결국 교수가 되고, 현남은 경비사무소에 잘린다.

엔딩은 관객에게 이 대조적인 삶의 결괏값을 극명하게암시한다. 교수가 된 윤주는 강의를 하는 도중 빔프로젝터를 위해 커튼을 친다. 산의 밝은 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장면에서 윤주의 표정은 우울하다. 대조적으로 산에 등산을 오르는 현남은 밝게 웃고 있다. 아내의 퇴직금으로 부정하게 교수자리에 오른 윤주는 오히려 불행하고, 아무 죄 없이 경비사무소에서 잘린 선량한 현남은 오히려 행복하고. 감독은 이 장면에서 관객들과 깊은 소통을 시도한다.


영화 직역처럼 짖는 개는 물지 않지만, 짖지 않는 개는 문다. 이 영화는 영화 러닝타임 내내 이 문구를 변주하며 관객을 상기시킨다. 원래 '짖는 개'는 윤주에게 희생당한 개들을 말하나, 영화에서는 이를 등장인물로 확장시킨다.

'짖는 개'는 겉보기에는 추악하고, 위협적이고, 모자라 보이는 경비아저씨, 집 없이 아파트를 전전하는 보일러 이 씨다. 실제로는 물지 않는다. 즉, 사람을 헤치지 않는다. 버려진 개를 보신탕 해 먹는다는 건 잘못됐으나, 사실 무거운 형량은 아니다. '짖지 않는 개'는 겉으로는 멀쩡하고, 똑똑해 보이나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뒤에서 비리를 저지르는 고윤주다. 그는 사람을 문다. 실제로 강아지를 두 마리나 죽이고 강자에게 뇌물을 바쳤다. 무거운 죄다. 무거운 죄를 짓지 않은 일반 소시민은 처벌을 받고, 진짜 죄를 지은 사람은 떳떳하다. 실제로 겉만 멀쩡한 윤주는 강아지를 죽인 살인범이자 뇌물범이다. 어떻게든 강아지를 살리고, 아내의 강아지를 찾아준 현남은 선량한 주민이다. 근데 결말은 정반대. 누구는 교수에 오르고, 누구는 직장에서 잘린다. 엔딩씬에서 현남이 산에 오르며 카메라를 보며 웃는 장면은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소시민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낼 희망을 주는 듯하다. 산은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무언가다. 각자의 목표나 꿈이 될 수도 있고, 삶의 행복, 오늘 하루를 살아내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나 의지 같은 것.

근데 윤주는 다 이뤘음에도 가까이 있는 산이 블라인드에 의해 시야에서 점점 가려져가나, 현남은 다 잃었음에도 산에 직접 오른다. 결국은 각종비리와 사회문제는 없어지고, 2000년대의 영화의 현재시점이 아닌 미래엔 약자가 승리하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감독의 간곡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극렬하게 대조적인 등장인물의 설정 속 영화는 인물이속한 배경에 사회이슈를 풍자하기 위한 다소 극단적인설정을 넣는다. 그래서 영화는 꽤나 복잡하다. 아내는 임신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잘리고, 현남은 비정규직에 여자라는 이유로 관리사무소에서도 직장을 잃고. 너 말고 일할 사람이 많단다. 온갖 비리로 연루된 건설업은 아파트 부실공사를 한다. 보일러 전문가 이 씨가 이를 파헤친다. 층간소음은 심각하다. 집에서 야밤에 호두를 망치로 내려치고, 강아지의 울음은 밤새 끊이지 않는다. 이게 어쩌면 윤주가 강아지를 죽인 시발점이기도 하다. 반려문화는 과도기를 넘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강아지를 죽여 보신탕을 해 먹고, 강아지는 아파트에 애초에 키우지 못하지만 암암리에 키운다. 반려인에게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 시대에 강아지를 키운다며 혀를 찬다. 빠른 경제발전 뒤편에 숨겨진 사회의 부작용과 기득권의 횡포를 꾸밈없이 드러낸 블랙코미디 영화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이슈는 20년 동안 방치하진 않았다. 아직 병을 앓고 있으나 종종 약을 먹고, 병원을 찾으나 아직 완치되진 않은 느낌. 겉보기엔 멀쩡하다. 근데 딱 한 가지.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 보는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의 횡포와 소시민이 겪는 고충은 영화 내내 변주된다. 영화에서도 개를 죽이는 사람 따로, 처벌받는 사람 따로다. 이득을 취하는 사람 따로, 피해 보는 사람 따로라는 거다.기득권자와 약자가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 이 세상을 등장인물을 통해 그대로 표출해 낸다. 지금도 무거운 누군가의 죄는 무죄판결을 받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연예인은 6개월 자숙기간만 가지고 다시 미디어에 나온다. 왜? 돈 있고, 이름 있고, 기득권층이거든. 영화에서 아무리 편들어줘 봤자 소시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따를 뿐. 할 수 있는 건 뒤에서 욕하는 것뿐이다.

힘 있는 정치인 및 기득권층들의 부패, 그리고 실력으로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는 사회. 이 영화에서 은유한불합리한 사회보상체계는 끊임없이 현실에서 이어져왔고, 우리는 그 안에서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우리는 경사가 높은 오르막길, 그들은 우리에겐 알려주지 않은 그들만의 지름길이 있다. 왜 돈돈 하면서, 어떻게든 주식, 코인 재테크로 한탕하려 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 발버둥 치고, 어릴 적부터 공부 아니면 인생 망하는 듯 가르치고. 왜냐면 그것 말고는 기득권층으로 갈 수 있는 사다리가 없거든. 그들이 이미 정상에서 다 끊어버렸거든.


이 영화는 현실판 오징어게임, 무한경쟁사회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더 이상줄어들진 않을 이 암담한 현실 가운데 영화는 말한다. 해결을 바라지 않는다고, 다만 우리가 이 사안을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졌냐고. 스스로 각자 자기 객관화를 해보자는 거다. 우리는 그래서 더 알아야 한다. ‘알 권리’는 현대판 소시민이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권리며, 의무다. 온갖 사회문제를 안은 이 세상 속 진짜 짖는 개는 누구고 실제 무는 개는 누군지 국민이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세상을 이 영화를 통해 바라본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잘 사는 나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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