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데이즈> 리뷰
하루하루가 스트레스로 가득한 날이 있었다.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를, 그야말로 형편없는 인생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서나, 관계에서나, 연애에서나, 건강에서나, 모든 게 삐걱댔다. 벌고 있는 돈은 자연스레 병원비로 나가기 일쑤였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자기 전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일어나서도 자책했다. 그 누구를 만나도, 그 어떤 관계에서도 처음에는 나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애썼으나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도 싫어졌다. 나는 나 스스로 그리고 타인에게 디폴트 값으로 그냥 작고 형편없는 인간이라 여겼다.
근데 세상에 영원한 건 없더라. 그렇게 지옥 같던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니, 상황이 바뀌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이 영화는 그때의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너를 더 아꼈어야 했어
영화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 노동자다. 그의 일상은 사사롭지만 꽤나 중요한 하루의 숙제들을 반복적으로 다룬다. 그 일상의 분위기는 부유하고 여유롭지 않아도 한없이 안온하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집 앞 자판기의 BOSS커피를 한잔 뽑아먹는다. 그리고 자동차 시동을 켠다. 오래된 카세트에 담긴 올드팝 음악을 튼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나무 아래서 나뭇잎 사이 해가 들어오는 장면을 필름카메라로 남긴다. 그리고 집에 온다. 책을 읽는다. 다음날도 똑같다. 무한반복이다.
어떤 날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손을 잡고 엄마를 찾아주다, 아이엄마에게 무시당하기도 한다. 히라야마의 손이 더럽다고 아이의 손을 물티슈로 닦아준다. 그는 웃어넘긴다.
어느 날은 같이 일하는 다카시가 여자친구와의 하룻밤을 위해 돈을 빌리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웃는다. 그리고는 일에 매진한다. 누군가는 생각할 수 있다. 한낱 청소부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하지만 그는 그런 본인이 좋다.
어떤 날은 조카가 놀러 오기도 한다. 그날은 자판기 커피를 두 개 사고, 책을 빌려주기도, 같이 목욕을 함께 하기도 한다. 혼자였던 일상이 어느 날 둘이 돼도 그는 좋다. 그리고 다음에 놀러 가자고 언제 갈 거냐고 하는 조카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일단 오늘을 즐기자고.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는 대사다. 조카에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말인지, 이 세상은 자꾸 변해가니 우리의 지금 이 애틋한 마음도, 순간도 영원할 수 없다는 의민지. 이 영화의 히로야마의 속사정과 배경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절제되고, 통제된 배경아래 독자로 하여금 본인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리고 열린 결말을 통해 히로야마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왜 지금 화장실청소부로 살고 있는지 주인공의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관객들은 매일의 일상이 반복되는 영화에다 러닝타임도 길어 통제된 영화로써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근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아주 조금씩 다른 그의 하루하루는 매일 듣는 그의 올드팝처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통제된 시퀀스는 영화전체의 안정감을 준다.
뻔하게 흘러간다는 건 어쩌면 예측가능하다는 것. 이 예측가능한 순간순간의 히로야마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예측가능하지 않은 교훈과 인사이트를 직접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이 영화 내 의도된 구성은 충분히 제 기능을 한다고 본다.
영화의 엔딩에서 히로야마의 복잡 미묘한 감정연기는 마치 우리네 인생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어떤 아픔이 있었을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웃기도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또다시 지나 지금 이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것. 필름카메라로 나무 사이의 빛을 찍는 그의 반복되는 일상은 결국 행복의 여정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그 행복은 거창하고 자극적인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절제된 일상이 만들어낸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내 경험처럼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그게 직장이 원인일 수도, 인간관계의 트러블일 수도, 예상치 못했던 불의의 사고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아픈 순간들을 매 순간 받아들이고, 때로는 피해 가면서 늘 최선의 현재를 맞이하기 위한 노력을 할 뿐이다. 그 힘듦의 정도도 우리 모두에겐 상대적이기에 이를 해결할 마땅한 정답도 없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누군가가 매일 반복적인 일상에 무료함을 느낀다 치자. 매일 직장상사에게 듣는 욕과 업무과중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조금만 차에 치여서 병가를 내고 몇 주간 회사를 안 갔으면 좋겠다'.
자, 근데 또 다른 취업준비생 누군가에게는 이 삶 자체가 선물이다. 차에 치이긴 개뿔, 몇 달간은 월급을 받지않아도 되니 제발 합격만 했으면 좋겠다는 심경이다. 실제로 그렇다. 이처럼 상대적이기에 누군가에게 어떤괴로운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된다.
그래서 순간의 어려움에 처할 때 마땅한 정답도, 해결책은 없어도 그냥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된다.
나는 참 소중하고, 행복한 사람이야. 더 아껴줄게
그렇게 나 자신을 그 어떤 상황에서든 놓지 않고 아끼면 된다. 힘들다고, 일이 괴롭다고, 모두가 나를 무시한다고 나까지 나를 무시하면 그건 그야말로 삶 전체가 무너진다. 나 하나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 몰리든 나를 아껴줘야 한다. 지금부터 그런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영화는 히로야마가 일상의 소소함과 안온함 속에서 아픈과거를 조금씩 치유하는 과정인 듯하다. 그래도 행복했다고. 앞으로 더 행복할 거라고 표정에서 말하고 있다.
현대인은 더 느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한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혹시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대단할 줄 알았던 내 성과도, 성취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한없이 밟혀가고, 내가 이뤘던 그 무언가는 그렇게 서서히 내게서 옅어져 간다.
어릴 때는 누구나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어른들이 '의사'가 훌륭한 직업이란 걸 남몰래 계속 자녀에게 투영시키거든. 나도 그랬다. 어릴 땐 의사의 종류도 제대로 몰랐던 나이임에도 의사가 훌륭한 직업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래희망을 쓰는 란에서나, 누군가 내 꿈을 물어볼 때라던가 늘 더 있어 보이기 위해, 더 좋아보이기 위해 의사를 얘기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도 똑같다. 고1 때에는 SKY대학교는 지금처럼 공부만 하면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고2가 되면 이제 그 꿈은 인서울대학교로 좁혀진다. 10% 안에만 들어서 서울을 벗어나지만 말자로 귀결된다.
자, 고3이 되면 어떨까. 지방 거점 국립대만 가도 다행이다. 메타인지가 그때서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비교아래 각자의 삶은 누구나 초라하고 덧없다고 여긴다. 그러니, SNS 사용 연령도 이제 제한을 두는 것이다.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꿈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되거든.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도 똑같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고뇌를 겪고 있고,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안 궁금하다. 연봉이 얼만지, 회사 복지가 뭔지, 보상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작위적인 행복이 제일 값지고 중요한 시대에서 그 작위적인 것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며 우린 살아간다.
스포트라이트 받는 화려한 연예인의 삶이 TV에 나온다. 누군 재테크로 몇억을 벌었다 한다. 그에 비해 출퇴근으로 반복되는 내 삶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근데 우리는 이제 안다. 이 반복적인 삶 안에서도 내가 통제하면서, 절제하면서 남긴 소중하고 꼭 필요한 시간이 있다는 걸.
무언가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게 있나요. 이 시간은 절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나요. 그 반복은 영화에서 흘러나온 올드팝의 화려한 변주처럼 타인에겐 감동이 된다. 그 지나온 반복에 만족하고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환희하면서 더 나은 반복을 만들어낸다.
‘통제된 반복 안에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게 하찮아보이는 일상 속 숨어있는 선물이며, 이 영화에서 말하는 인생이다. 그리고 그 반복이 마침 끝날 때 나는 나에게 얘기한다.
다 고생했어. 너무 고생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