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북> 리뷰
1960년대의 미국의 모습. 영화에 적나라하게 나오는 이 장면과 현실은 매우 흡사하다. 흑인은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회적 풍토. 흑인들은 그들이 받는 부조리함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세상에 그 어떤 반문도 못한 채 순응하며 살아간다.
도리어, 흑인이 흑인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은 백인의 시선으로 비아냥댈 뿐. 화장실, 호텔, 통금시간, 먹는 음식, 말하는 단어, 사회적 시선 당시 이 모든 부작용을 백인도 흑인도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실제의 불편함을 불편하지 않게 연출한 노련함이 돋보이는영화다. 자극적이고 불필요한 클리셰나, 과한 액션으로 현대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단순 킬링타임용 영화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명작.
왜냐? 억지웃음과 억지감동, 인위적으로 관객에게 영화값에 상응하는 어떤 감정적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는강박이 없다. 러닝타임 2시간 내내 관객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찾아오는 은은한 감동과 재미는 왜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이나 찾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높은 영상미와 각 플롯에 나타나는 각 시대상을 보여주는 디테일은 이 영화의 허점을 메꾸는 데에 충분히 차고 넘친다.
1960년대 미국엔 아프리카계 흑인 천재 피아노니스트가 있다. 그의 이름은 셜리. 유독 흑인 차별로 유명한미국 남부투어를 계획 중이다. 그는 현재의 경제적 풍요를 더 키우고자 함이 아니다. 그에겐 돈과 바꿀 수 없는 하지만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꿈이 있다. 바꾸고 싶은 사회적 문제가 있다.
멀지 않은 뉴욕 브롱스에는 이탈리아계 한 백인 남성이 있다. 입담으로는 동네에서 이길자가 없는 그는 클럽 경비원 일에 잘리고, 마땅한 직업하나 없는 상태에서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다 셜리의 운전사로 남부투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 둘은 흑인과 백인, 사회적 갑과 을로 만나 정반대의 직위와 역할로 여행을 떠난다. 토니의 아내가 만든 셜리를 위한 샌드위치를 건네지 않는 모습, 셜리의 짐하나 옮기려 하지 않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그린 플롯에서는 사회적 불평등 속 철저히 적응된 두 남자의 웃픈 현실을 나타낸다.
날 안 뽑을 거면 저 아시안 짱깨랑 어디 안전한 여행 한번 잘해보시지
면접 후 불만스러운 표정과 함께 말하는 이 토니의 대사는 어쨌거나 서로가 그 어떤 감정 없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형성된 집단임을 영화 초기에 미리 나타낸다. 셜리는 백인과 동행을 통해 최소한의 안전을 바라고, 토니는 가족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돈을 바란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이미 채웠다는 묘한 기대감으로 관객들을 안심시킨다.
자, 그런데 아뿔싸. 여행 중 셜리는 흑인들이 즐기는 재즈바에서 시비를 당해 경찰에게 불려 가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호텔의 레스토랑과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백인경찰에게 이유 없이 차별을 당하며 감옥에 갇히는 등 본인의 생각과는 더 참혹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영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여럿 마주하는 위기 속에 토니는 백인으로써 혹은 직업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으로 본인이 애초에 느끼고 있던 내면의 변화를 몸소 느끼게 된다. 흑인의 삶을 사는 백인 토니, 백인의 삶을 사는 흑인 셜리는 그렇게 각각의 여행지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에피소드마다 그들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간다.
끝내 남부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뉴욕의 크리스마스이브 밤. 토니는 셜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면서 셜리는 가족의 유대와 온기를 느낀다. 그의 결핍은 그렇게 사랑으로 조금씩 채워지며 영화는 해피앤딩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 제목 ‘그린북’은 ‘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으로 직역하면 60년대까지 실존했던 미국 여행북이다. 흑인과 함께 다니는 데에 문제를 최소화시켜 줄 흑인을 위한 가이드북이다. 아니, 정확히는 흑인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나 음식점 등의 정보를 모아 제공했던 토니처럼 흑인과 함께 동행하는 자를 위한 가이드북이다. 하지만 이 그린북은 단순히 가이드북을 넘어 결핍을 숨기지 않고 보이는 둘 이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에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서로의 결핍을 스스럼없이 보이고, 그 결핍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결핍을 덮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매력적인 실화 스토리 내내 얼마든지 제목으로 만들 수 있었던 수많은 소재 후보가 그린북 앞에서 결국 묻혀버리는 것이다. 철옹성처럼 단단히 굳혀진 백인들의 세계는 이 그린북으로 작은 구멍이나 흠집이라도 만들어 낼 힘이 있다. 철옹성의 잔재가 미세하게 남은 현재 시대상의 시선에서 셜리와 토니 등장인물이 주는 하모니는미래의 우리가 맞이할 결핍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준다. 미래에도 합리적인 누군가가 만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 낼 거라는 작은 꿈같은 것.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품을 수 있을까. 현대인은 서로의 결핍을 품기는커녕, 더 들춰내고 부각하기 여념이 없다. 오히려 없는 결핍마저 만들어 서로를 헐뜯는다. 다름을 포용하기보다 정해진 규정에 더 큰 의미부여를하는 지독한 원칙주의자 같다. 심지어 그 원칙이라 함은, 모두에게 정당하고 이로운 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기득권자의 이해관계와 손익이 철저히 계산돼 녹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익을 보는 누군가가 있으면 당연히 그 이익에 상응하는 손해를 보는 누군가도 존재한다는 것. 이 현대판 치킨게임은 원칙주의자가 만들어낸 ‘법’이라는 근사한 이름 앞에 끊임없이 지속되고 관념처럼 굳어져간다. 이와 동시에 소시민들의 희망과 꿈은 한없이 무너져 내린다. 인종을 떠난 그들의 우정은 단순히 미국의 시대상 반영을 넘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다름을 어떻게 더 좁혀나갈 수 있는지의 물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그것도 부담스럽지 않게 아주 은은하게. 진짜 매력적이다.
누군가는 돈이 많아 강남이나 서초 아파트에 살면서 자녀를 대치동 학원에 보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이 없어 서울에서 밀려나 토니처럼 일용직을 전전하며 당장의 가족의 맛있는 밥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이들의 자본이 주는 명목상의 숫자 차이는 결코 강남 부자 주민의 외로움과 경기도 소시민의 정신적 풍족함을 대변하지 못한다. 현대사회와 비교하자면 전자의 외로움이 곧 셜리의 ‘흑인’이고, 후자의 정신적 풍족함은 토니의 ‘백인’ 적 요소와 일치한다. 당시의 시대상은 바꿀 수 없는 출생의 요소에 힘을 뒀다면, 현재는 바꿀 수 있는 풍요의 정도에만 집착한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사회적 시선에선 자산의 숫자의 차이에 평가되고 그 평가는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 증여세의 차이지 결코 이 대물림은 자녀가 없지 않은 한 끊기지 않으니. 이 풍요 속의 빈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배려와 연대를 할 수 있을까. 아무쪼록 영화의 대사처럼 폭력은 결코 이길 수 없지만 품위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돌봐야 한다.
Sinking ship. 가라앉는 배에선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 모두가 동시에 탈출해 다 같이 빠지기보단 여성과 아이들, 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가진 이들에게 먼저 배려하는 수밖에.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알려주는 2번, 3번 봐도 지루하지 않을 웰메이드 영화다.
P.S:
<주의> 다이어터들에게 이 영화는 위험하다. 영화를 다 본 즉시 KFC로 달려가 프라이드치킨을 뜯고 싶을 것. 영화를 전부 봐야만 이 말에 공감할 수 있다.
난 실제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