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한 기업의 정규직으로 입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본주의에서 주식과 코인이 오르거나 서울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뼈대를 형성하는 개념일 테다. 나무가 줄기를 뻗어가며 열매를 맺듯, 가지치기를 만들어가는 나무 몸통 즉, 가장 기본적인 표본이 된다.
정기적으로 매월 받는 300만 원의 급여소득자는 7억자산을 소유한 것과 같은 개념과 같다한다. 그 노동은 내 가족과 더불어 본인이 가치 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수단이 된다. 청년취업난, 은둔청년이 사회문제가 되고, 자산 양극화에 따른 포모현상 및 사회구성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넘어 혐오, 비교가 당연시된 이 자본주의에서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현대사회를 웃음으로 승화해 내는 블랙코미디로 대중들에게 편안히 다가간다.
<헤어질 결심>에서 나올법한 남녀 간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별보다 경쟁 앞에 더할 나위 없이 찌질하고, 폭력적이며, 처절한 한 가정의 불안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대중들은 2시간의 러닝타임을 다른 별에서 온 저세상얘기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 로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재취업을 위해 살인을 한다는 설정은 현실과의 괴리감이 있다는 점, 굉장히 짧고 전개가 빠른 플롯들 때문에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다소 아쉬운 요소다. 하지만 그걸 박찬욱만의 새로운 시도로만 본다면 그의 상상력 과잉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옥에 티를 일부러 냈거나, 이 아쉬운 점마저 대중들이 해석해야 하고 쫓아야 할 어떤 기준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취업’이라는 일반인에게 삶과 직결된 문제를 공포물로 취급한 건 역대 본 적 없는 신선한 블랙코미디임은 확실하다.
오프닝부터 주인공 만수네는 마당에서 장어를 구워 먹고 따스한 태양아래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설정한다. 이런 작위적인 오프닝부터 무언가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불길함을 대중들에게 넌지시 알린다. 눈치를 채냐, 못 채냐는 대중들의 몫이다.
만수는 25년 경력의 제지회사의 전문가다. 그는 돌연 회사로부터 해고통보를 받는다. 반려견도 보내고, 가구, 자가용까지 바꾸며 긴축재정을 계획하면서 그는 가족들에게 3개월 안에 꼭 재취업에 성공한다고 알린다. 경쟁업체 ‘문제지‘ 에 비굴하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구직활동을 했지만 더 처절하게 거절당한다. 이런 비참한 현실이 계속되자, 이 3개월간의 구직활동계획은 비정상적인 계획으로 차츰 변해간다. 영화 제목 그대로 어쩔 수가 없다. 뭘? 경쟁자들을 제거해서라도 꼭 내가 재취업을 해야겠다는 괴짜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첫 대비적 요소를 대중들에게 보인다. 만수가 잘린 전회사 ‘태양’과 새로 입사하려는 회사인 ‘문(moon)’제지. 영화 오프닝에서 햇살이 뇌리 쬐며 행복을 느꼈던 그 햇살은 사실 진짜 행복이 아니었다는 것. 결국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안정은 태양이 아닌 달에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태양이 주는 햇살에 행복해하며 그는 달을 쟁취하기 위한 살인행각을 계획한다. 이 설정부터 박찬욱감독이 나타내고자 했던 메시지가 보인다.
우리가 대체로 일컫는 안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놓고 보면 안정이 아니었다는 것. 늦은 오후 강하게 뇌리 쬐는 햇살은 결국 까고 보니 불안이었다. 영화는 이를 철저히 숨기면서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남긴다. 빨리 알아채라고. 만약 한 회사의 정규직이 영원한 안정과 행복을 뜻했다면 잘린 전회사의 이름을 ‘문’ 그리고 앞으로 재취업을 하게 될 회사를 ‘태양’이라고 짓지 않았을까. 정규직이 인생의 목표가 된 사회, 그리고 그걸 모두가 당연시 여기며 축하해 주고,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만 대접받고, 이 명사가 목표가 돼버린 사회를 블랙코미디답게 시작부터 풍자하는 거다. 감독도 알고, 대중도, 누구나 안다. 명사가 목표가 된 사회는 개개인의 안정과 사회전체의 안정을 이끌기 힘들다는 걸. 안정도 수없이 많은 불안과 변화, 혁명에서 결국 오는 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가 그랬다.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조선이 있었을까. 4.19 혁명,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이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졌을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만수는 영화 2시간 내내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을 가만히 놔두질 못한다. 왜? 잘리기 전에도, 잘려도, 잘리고 재취업에 성공해도 삶자체가 불안하니까.
각각의 살인에는 자본주의가 주는 냉혹함이 섞여있다. 세 번의 살인을 파트를 나누어 사회문제의 비극을 풍자한다. 먼저 만수는 제지만을 쫓았던 장인 범모의 가족 간의 단절, 아내의 외도를 간접적으로 보며 웃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경험한다. 그리고 딸에게 용돈을 주기 위해 구두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소시민 시조를 죽일 때에도 자본주의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의 벅참을 경험한다. 위스키를 사들고 본인이 차지해야 하는 그 자리에 있는 선출을 술을 마시며 죽일 때도 마찬가지. 일이 많으면 만수처럼 이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 한 명 더 뽑아야 한다는 선출의 푸념에 만수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맞받아치며 권유한다. 그럼에도 절대 본인은 나서지 않는 자본주의의 냉혹함, 본인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보인다. 뭐 사실 상관없는 게 만수가 계획한 세 번의 살인 자체도 어쩌면 본인만 생각한 이기적인 계획이었을 테니.
박찬욱감독은 이 사회풍자를 드러내고자 영화에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옥에 티를 만든다. 이 모든 사회문제를 드러내려면 이 두시 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부족하거든. 알리바이가 있다한들,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근거가 있는 이 살인에도 교묘하게 주인공 만수를 살려주고, 경찰들의 허술한 조사에 대해 대중이 의문을 품지 못하도록 한다. 또 대만에서 유명한 ‘카발란’같이 한 병에 오십만 원이 넘는 위스키를 일면식도 없는 이와 함께 그의 집에 들어가 만취하는 점, 노동자를 위하는 척 잘린 직원들을 위한 연설을 해주나 정작 본인이 잘리자 그보다 더한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만수의 자기기만적 행위 등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모두를 죽이고 결국 문제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면접을 볼 때 한 면접관은 햇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뭐랄까. 여기서 두 번째 대비요소가 나온다. 문제지에 입사하는 것이 밝은 미래처럼 보이나 면접관의 얼굴은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흑을 드러내고자 하는 복선인 것. 그 복선의 기능을 정확히 살려 정작 입사한 곳에서는 거대한 공장에 혼자 근무하고 있다. AI와 기계가 모든 일을 대신하고 그 공장 전체에선 본인 혼자 사람이다. 마지막 남은 그 감독하는 자리마저 언젠가 AI에게 대체당할 것이고, 이는 3번의 살인이 무색할 만큼 또 만수는 하루아침에 잘려나갈 것이다. 결국은 영화 러닝타임 내내 뻘짓한거다. 어떻게 이게 밝은 미래라 할 수 있나. 당장 발등에 불 끈 격밖에 안된다. 가정의 평화는 개뿔.
단순히 사회풍자를 넘어 박찬욱감독은 AI라는 절대무기를 얹으면서 마지막 요리를 완성한다.
'Cherry on top' 느낌. 마지막 정점을 찍는다. 한 인간이 마주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풍자함을 넘어 사회전체가 바뀜으로써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불편함은 올 수밖에 없다는 이중적 면모를 영화의 엔딩에 나타낸다. 이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본인의 밥벌이를 ‘평생’ 지켜줄 절대적인 무언가는 없다는 명백한 증거랄까. 한 노동자의 삶을 넘어 이런 사회를 맞이한 공동체의 위기를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답이 제목에 두괄적으로 드러냈지 않나. 어쩔 수가 없다고. 그냥 다 적자생존이라고. 다 죽었다 이거야.
한편, 깨알같이 숨겨둔 극 중 장면들의 작은 풍자도 꽤 재밌다. 딸 리원의 천재적인 첼로연주 뒤에 자리한 자폐증상, 이해하기 힘든 표현패턴 그리고 아들의 잦은 도벽에도 만수와 아내의 일상엔 그 어떤 잠식도 없다. 이마저도 무색하게 만수에게 닥친 현실이 그만큼 고되다는 것. 영화에서 은연중 드러난 만수라는 등장인물의 역할은 회사 직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한 사람은 각자 환경에서 각기 다른 기능을 한다. 그는 회사에서의 직원, 한 가정의 가장, 이웃사촌, 학부모 등 다양하다. 한 인물설정 안에 가부장제도의 비판, 실업문제, 세대 간 갈등, 기술발전에 따른 도태되는 인간, 제지회사에 다니며 환경파괴까지. 모든 걸 압축적으로 드러낸 의미 있는 한 가상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 삶 자체가 고될 수밖에.
영화의 엔딩엔 마지막 세 번째 대비적 요소가 나온다. 엔딩크레딧에 영화의 배우 이름이 아날로그 형식으로 써진다. 그러면서 그 종이는 AI와 기계에 의해 잘려나간다. 아날로그와 AI사이에서 잘려나가는 종이와 사람의 대칭적 구조는 많은 변화 속 자본주의의 치킨게임을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인간이나 종이나 사실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매한가지니, 똑같은 이치로 보자면 이런 공통적 설정이 대중들에게 더 와닿았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의 경쟁이 이렇게 무섭게 다가온 적은 처음이다.
어떻게든 좋은 일자리, 어떻게든 많은 자산을 가지는 동력자체는 상위 1%가 되어 성공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본능이자 최소한의 바람일 것이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하위 99%는 오늘도 일을 하고, 로또를 사고, 노력과 시간을 쏟아붓고, 공부를 하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으로 잡으려 발버둥 친다.
상위 1%가 되면 행복해? 아, 너무 행복하겠지. 돈 걱정없이 내 가족 좋은 데서 살고 맛있는 거 먹고 여행이나 다니고. 근데 그 와중에 상위 1%를 차지한 이들 중 마약을 해 제정신에 깨어있는 시간이 드물고, 자살을 하고, 이혼을 하고, 불행한 삶의 이면의 존재도 있으나 우린 모른 체한다.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다.
이 자본주의 피 끓는 경쟁 속에 나는 뭘 남겨야 하는가.만수 같은 자기기만적 인물설정 없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자본주의에서 대체 뭘 남겨갈 수 있을까 하는 거대한 망상에 사로잡힌다.
아, 영화를 보고 나오며 씁쓸한 이 웃음은 잘 숨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