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옥자> 리뷰
세계 유일 아이돌 제작방식을 확립한 나라 한국.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아이돌 제작사들은 돈을 쓸어담는다. 그 뒤편 18세 여고생의 월경이 멈추는 불편한 진실은 철저히 숨긴다. 과도한 식단관리와 가스라이팅으로 건강이 위태로워도 팬들은 거대한 자본으로 꾸며진 화려한 외모와 몸매에 열광한다. 미성년자가 성형수술을 해서 본인의 얼굴을 잃어가고 건강을 해쳐가며 본인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야하는 이 비윤리적이고 참혹한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이사회는 잔잔하게 조명한다. 케이팝, 문화강국에 단순히 자랑스러워하고 좋아할게 아니란거다. 뭐? 연예인 삶은 일반인과 괴리감이 있다고?
일상에서 꽤나 흔히 접하는 투잡, 쓰리잡하는 한 가정의 가장의 모습을 보자. 중소기업에 다니는 가장은 월급만으로 자녀학원비에, 생활비에, 보험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퇴근 후 배달, 대리운전을 하고 4시간 자면 다음날 또 출근. 쉬는 날은 사치다. 그런 거 없다.
그가 버는 돈과 그의 건강은 정확히 상응하게 맞교환되고, 그의 아내와 자녀는 그가 건강을 잃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활이 안되기에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한 가정의 삶은 멀지 않은 미래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 바로 내 옆집이 될 수도 옆 짝꿍 철수의 아버지일 수도, 회사의 팀장님, 우리형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익숙하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마저 어떻게든 숫자로, 데이터로,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어떤 신념으로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자유롭지는 못할망정 조금이나마 거리를 둘 수 있는 법은 없을까. 이 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대중들 각자에게 영화 <옥자>는 꽤나 직설적이고 진정성 있게 이 시대의 본질을 풍자한다.
깊은 산골, 주인공 미자는 할아버지와 슈퍼돼지 한 마리 옥자와 살고 있다. 이 옥자는 10년 전 미국의 식품업계 대기업 미란도그룹의 ‘슈퍼돼지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실험체다. 그것도 모른채 미자는 어릴적 삶에 자연스레 스며든 옥자와 십 년 동안 순수한 우정을 그려왔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미란도 직원의 방문으로 산산이 뭉개지고 둘의 우정엔 큰 위기가 찾아온다.
미자와 할아버지의 동의 없이 이미 옥자가 전세계의 26마리 슈퍼돼지와 비교했을 때 가장 잘 커 왔다는 이유하나로 옥자의 뉴욕 콘테스트의 참가가 확정된다.
미자가 자리를 비운사이, 옥자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서울로 보내지고 미자는 한밤중 옥자를 찾으러 서울로향한다. 미자는 서울에서 비밀 동물연대 ALF를 만나게되고 이들은 미란도 그룹의 동물학대의 만행을 알리고자 옥자 구출을 돕는다. 이 과정에서 이미 미디어에 노출된 옥자를 미란도그룹은 회사 이미지제고를 위해 이를 재기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녀를 뉴욕으로 함께 초대해 옥자와 재회하는 극적인 스토리를 연출하려는 것. 미란도그룹은 이 페스티벌에서 환경보호 및 식량위기해결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실제는 현실과 정반대로 펼쳐진다.
한편 이 프로젝트에서 비밀 동물연대 ALF는 만만의 준비를 하고있다. 이 페스티벌에서 옥자를 구출하고, 강제로 짝짓기를 시켜 슈퍼돼지를 번식시키는 미란도그룹의 만행을 대중들에게 이를 각인시키려한다. 결국 페스티벌에서 옥자를 구출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대중들에게 모든 사실은 밝혀진다.
봉준호는 미란도그룹만으로 자본주의를 풍자하지 않는다. 단순히 기업이 아니라 이 체제를 견고히 유지시키는 소비자들 개개인을 모두 공범으로 삼는다. 슈퍼돼지가 지하상가를 헤맬 때 사진 찍는 사람들, 영상을 켜고 방송하는 사람들, 시키는 대로 그저 돈주니 동물연대를 제압하는 블랙요원들, 황금돼지 받고 아무런 정이나 죄의식, 최소한의 동정조차 없는 미자의 할아버지, 맛있게 슈퍼돼지 소시지를 소비하는 시식단, 개인의 의견 존중 없이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마음아래 이 일을 벌인 강제적이고 이기적인 ALF 통역요원까지.
심지어 4대 보험 없는 트럭운전사는 만행을 하든 누구를 돕든 내 알빠아니고 나만 피해 안 가면 된다는 무한이기주의가 있다. 비정규직 사회문제를 고발함과 동시에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는 개개인의 무능력함에도일침을 가한다. 개개인이 움직여 이 자본주의의 민낯을 바꿀 수 있다는 알량한 희망마저 영화는 무력화시킨다. 웃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등장인물 모두 빠짐없이 각각의 풍자를 심어놓은 봉준호스럽고, 봉준호만이 할 수 있는 블랙코미디 아니, 영화가 아닌 거대한 하나의 다큐를 보는듯하다.
우리는 늘 가장 소중한 걸 잃고 나서야 후회한다. 그리고 대개 그 가장 소중한 것은 한번 잃으면 원래 제자리로 100% 복원하기가 힘들다. 건강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나. 시력이 나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현대의학은 몸이 아플 때 다 낫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이상의 악화가 없도록 만들어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라지면 다시 현생에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성취를 이루고자 미치도록 달려들지만 포기하고 재도전할 때에는 처음의 그 열정은사라진 지 오래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뭘까.
자본주의의 존재이유, 절대적 기준인 돈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고 맞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근데 이게 사실 인생에서 우리는 제일 소중하다고 허물없이 인정하지않나.
이런 무형의 가치들이 사실 가장 소중하며, 그걸 온전히 누를 때 우리는 돈을 소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영화다.
사회가 잘 굴러가도록 최소한의 질서를 위한 돈.
그것이 사람 아니, 영화 속 미자처럼 동물에 대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가지는 그 어떤 감정과 상응하게 돈이 맞교환되도록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앤딩에서 미자는 황금돼지를 낸시에서 전하며 이걸 가져가고 옥자를 풀어주라고 말한다. 낸시는 충분히 값어치를 한다며 옥자를 풀어주고, 실험실에서 몰래 입으로 숨겨온 새끼돼지와 함께 다시 산속의 평화는 찾아온다. 새끼돼지의 어미가 철조망을 열어 본인의 새끼를 탈출하도록 만든 심경은 과연 어땠을까. 이런 세상에서 살지 말고 좀 더 자유로운 곳에서 나는 곧 인간의 돈 때문에 죽지만 내 자식만큼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다짐이지 않았을까.
이 세상은 더 많은 돈을 내게서 뺏어가기 위해 결핍을 무한정으로 생산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결핍이 필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마치 심각한 듯 홍보, 마케팅한다. 그래야 내 지갑이 열릴 테니까. 남들이 인정하는 그럴싸한 소비로 평가받는 삶이란 게 그 끝은 과연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적어도 미자는 돈은 없다한들 사랑하는 옥자는 남아있지 않나. 자본주의의 돈은 이토록 타인을 평가하고, 본인만 중시하는 삶으로 한 개인을 철저히 밀어 넣는다. 그 한 개인이 사회에서 어떤 좋은 역할을 할수 있는지를 잊게 만든다. 개인의 지나친 이익추구는 공동체에 결국 해가 되고, 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회문제로 번진다.미란도그룹이 하는 행태가 바로딱 그런 것이다.
최소 미자가 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영화 초반부 미자가 낭떠러지에서 죽을 뻔할 때 옥자가 구해준 장면이 있다. 적어도 그녀는 한 동물에 대한 부채감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가장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한의 양심이다 양심.
현대인에게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의 연약함을 살피는기꺼운 책임과 연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동전의 한 면만 바라봤을 때 그 뒷면이 어떤 건지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고 섣불리 짐작만 하는 삶이 안타까울 뿐.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조리를 우화적인 요소를 가미해 부담스럽지 않게 그려낸 봉준호만 할 수 있는 두 시간의 값진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