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난 손 내밀 수 있나

영화 <주토피아2> 리뷰

by 홍그리


Love you, Partner.


닉과 주디처럼 연인이 아니라면 상호 간의 사랑이라는감정이 개입되기 전까지의 소울메이트에게 할 수 있는최선의 언어가 아닐까 한다. 화사한 파스텔톤과 아기자기한 등장인물이 사랑과 화합, 우정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선한 동심의 언어를 떠올리게 하는 디즈니의9년 만의 야심작 주토피아2는 무한경쟁사회에 지친 현대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주토피아 1을 봤던 이들에게 익숙하게도 등장인물의 중심엔 주디와 닉이 있다. 주디는 토끼, 닉은 여우. 애초부터 전혀 다른 생활습성을 가진 이 둘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바로 경찰파트너가 된 것.

던 벨웨더시장사건이 해결되고 주토피아의 유명인사가 된 닉과 주디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감수하며 새롭게 합을 맞춰가는 데 그 과정이 꼭 현대인의 인간관계 속 겪는 모든 희로애락이 오버랩되는 듯하다.

디즈니의 배경과 세계관, 등장인물 설정은 한순간 잊고 있던 소중한 가치를 어렴풋하게나마 관객에게 상기시켜 주려는 게 주된 목적일지 모른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만큼은 본인 하루를 채워가는 목적과 방향 전환을이끌어보라고.

영화는 신비로운 책을 숨긴 뱀(게리)을 추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게리가 신비스러운 책을 숨긴 장본인으로서 자연스레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뱀은 파충류로 분류되며 영화에서는 보잘것 짝이 없는 존재에, 악한 설정이다. 주토피아의 구성원으로서 파충류는 우선 환영받지 못하며, 주토피아 내 권력자 렁슬리는 파충류에게 더 강한 프레임을 씌운다. 링슬리는 파충류를 향한 혐오를 조장하고 주토피아의 모든 동물들은 그 프레임에 갇힌다. 게리는 그렇게 구성원 모두에게 사회의 악이자,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다. 그걸 모른 채 닉과 주디는 이 누명이 파헤치기 전까지 게리를 쫓아간다. 그리고 렁슬리 본인은 게리집안을 몰아내고 주토피아시를 확장시켜 본인의 세력을 더 넓히려 한다. 이처럼 주토피아에서 렁슬리의 가문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이 가문이 어떤 가문이냐. 특허를 빼앗고 시장을 갈아치울 수 있는 막대한 권력행사하는 악의적 인물이다. 돈과 권력 앞에서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현대사회의 독재자라 생각하면 된다.

주토피아2 인물 등장과 동시에 이 세계관은 애석하게도 아무 배경 없는 억지스러운 설정이 아니라 현 자본주의의 민낯과, 피해받는 특정계층을 꼬집는다. 예를 들어 닉은 혼자 사는 자유로운 여우이지만 슬프게도 아무도 그를 찾는 가족 없이 외롭게 지하방에 산다. 주디도 다가구주택을 연상시키는 좁디좁은 집에 살고, 세력자 렁슬리는 거대한 저택이 배경인걸 보아 등장인물의 설정부터 자본주의의 계층 간 격차를 복선한다. 숨기고 싶어도 억지로 드러나는 이 배경에 세계관이 오버랩되며 현대사회의 배경과 이질감을 낮춘다.

주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또 다른 말이 아니라, 그런 자본주의에 감춰진 양 극단의 계급격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런 곳이다. 심지어 게리역을 맡은 거기 들어오지도 못하는 누군가는 현실에서 사람취급도 못 받는 최하층에 속한 누군가겠지.

예를 들어, 영화 초반 툰드라 기후장벽을 부수는데 영화는 기후문제를 다루기보다 장벽에 더 무게를 둔다. 장벽을 비유해 가진 사람은 본인만의 철옹성을 더 쌓고, 게리와 같은 파충류는 과감히 주력사회에서 버려진다. 캐나다나 유럽은 이민자로 하여금 발생한 각종 사회문제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 문제의 주체 이민자를 양면적인 관점에서 투영하지 않을지라도, 철저히 사회에서 소외되는 그들의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김영하의 <검은 꽃> 같은 소설에서나 보일법한 일제강점기 한국의 초기 이민자의 참혹한 현실이 등장인물 게리와 다르다고 할 점은 단 하나뿐이다. 극적인 결말. 영화는 영화답게 끝내 게리와 그의 가족 파충류들은 누명을 벗고 다시 주토피아 일원이 되지만, 한국 초기이민자들은 비극적 결말을 맞는 딱 그 정도. 권선징악과 헤피엔딩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너무 귀엽다', '엔딩곡이 너무 좋다, 역시 에드쉬런', ‘재밌다, 웃기다, 역시 디즈니!’라고 영화가 끝나면서 듣는 관객들의 후기 몇 마디로 이 영화를 흘려보내기엔 이 주토피아 시리즈가 꽤나 아까운 점이 많다. 양 극단의 치우친 성격의 두 등장인물과 진정한 유토피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과각자 진정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는 듯하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주디. 주디에게는 본인이 가진 성취감이 곧 삶의 이유가 된다. 이론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영화에선 이론적으로 공부를 한다거나,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만류와 걱정에도 본인이 원하는 이상향을 찾아 나선다. 반대로 생각하면 주변사람들의 이런 관심과 사랑 덕분에 본인의 이상향에 좀 더 깊게 집중할 수도 있다고도 본다. 이성취지향적인 토끼도 불안할 때가 있는데, 주디의 불안은 결국 맡은 바 역할을 해낼 수 없을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때 온다.

반면, 닉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냐' 라며 주디를 걱정한다. 어쩔 땐 그의 농담이 재밌기도 하지만 이 농담은 중요하거나 꽤나 진지한 상황일 때 방어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닉은 주디를 편안하고 웃겨주려 하는 거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질문이나 요구를 회피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닉의 등장인물 설정이 마치 나와 자기 복제를 한 듯해 감정이입이 꽤 많이 됐는데 장난끼가 많고 재밌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말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진지한 상황을 당당히 맞서지 못하며, 매사가 장난 같다는 상대의 말에 상처받기도 하고 약간 그런 부류다. 주디와 달리 가족과 친구의 관심과 사랑 없이 어떤 말할 수 없는 결핍이 상존하며, 본인이 더 행복하려 애쓰는 타입. 하지만 냉철하고 이성적인 직관성보다 여유롭고 긍정적인 인간성이 강점인 그는 주디에게 주디 본인의이상향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기폭제일지 모른다. 결국 주디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닉뿐이다. 정의는 개나 줘버리고, 결국 본인밖에 모르는 것처럼 생각했던 닉은 끝내 마지막에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지언정 해독제에 몸을 던져 주디를 구하지 않나. 끔찍하게 자신을 아낀 들, 자신만큼 주디도 거기에 상응하는 가치로 중요하다는 거다.

주디의 꿈이 주토피아를 지키고 만들어가는 일이라면,닉에게는 그 이상이 주디였던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대사에서도 '사랑해, 파트너'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어쩔 수 없는 파트너의 설정이지만 이는 어쩌면 우정이라는 포장을 덮은 사랑 아니었을까라는 엉뚱한 상상도 한다.

이 영화는 모두가 다른 각자 개개인이 관계를 만들어가고, 그 관계가 결국 이들 전체를 아우르는 주토피아 같은 국가가 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심을 하게 만든다. 왜? 구태의연하고 원론적인 권선징악적 결말이 주는 디즈니라도 그 안에서 겪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은 현대사회와 별바 다를 바가 없거든.

이 세상에서 모든 스트레스와 고민의 근원은 80% 이상 관계에서 온다고 본다. 미시적으로 보면 연인 간의 다툼, 집안일이나 육아 등의 배우자와의 다툼, 직장상사와의 갈등, 친구의 배신 등 여러 사례가 있을 수 있겠다. 직장을 예로 들면, 상사의 꾸짖음이나 온갖 스트레스에도 승진이나, 평가에 목숨 걸고 어떻게든 본인이 추구하는 뭔가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자처럼 목표가 거창하지 않아도 묵묵히 이들을 지원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도 있다. 이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니 혐오와 갈등은 어떤 성향이든 때와 장소불문 생기기 마련이고 주토피아 2는 어떻게 이들과 함께 시너지를 내며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가능케 한다.

거시적으로는 그 구성원들이 만든 영화에서 주토피아,우리는 한 국가가 되겠지. 근데 말이 좋아 포용이지, 누군가를 표용한다는 것 자체는 내가 마치 손해 보는 것 같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여태껏 삶을 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용서나 포용이나 화합 이 단어들은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나 스스로를 내려놓는 작업이며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기에 굉장히큰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 영화가 아쉬운 건 무조건적인 아름다운 결말설정보다 이 포용과 용서라는 감정이 한 사람에 불러일으킬 동기부여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게 용기의 시작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봉사하고, 상대를 경청하고, 배려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용기를 가진 그 시발점의 계기가 없으니 개인이 안 바뀌고, 사회는 계속 팍팍해지고 살기 힘들어진다. 심지어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디즈니 배경 속 감출 수 없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거라면, 특히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꿀 수 없는 거라면 어떻게 양극단의 그 경계를 좁혀나갈지의 얘기는이 주토피아 시리즈에 너무 많은 바람인 걸까. 어쨌거나 디즈니조차 자본주의를 피할 순 없다.


재미요소를 떠나 이 자본주의 사회에 접목시켜 해석하자면 진정한 유토피아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그게 돈이 됐든, 마음이 됐든, 난 뭘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첫 번째이지 않을까. 특히 나와는 다르고 도태된 누군가에겐 더더욱. 그런 개인이 많을 때 진정 영화에서의 권선징악적 결말이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어가는 주디에게 낭떠러지에서 목숨 바쳐 약을 구해온 닉과 이 현실은 다를 바 없다. 얼마나 내가 먼저 손 내밀 수 있나. 그 내미는 거리가 길고 멀수록 그 삶의 내면은 훨씬 더 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