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난의 두께는 몇 겹이었나

영화 <가버나움> 리뷰

by 홍그리

가난의 두께. 혹은 농도. 밀도. 그게 크든 작든 어떤 잣대와 기준이 분명한 단어.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형용가능한 모든 단어를 이 가난에 다 갖다 붙여도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까. 경제적 풍요와 가난을 결정지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상대성’뿐이다. 내 의식주가 온전하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사고 싶은 걸 마음껏 살 수 있지만 넉넉하지는 않은 삶. 누구는 이를 가난이라 조롱한다. 아니, 현대사회의 대다수가 그렇겠지.


“더 돈을 벌어야지, 더 성공해야지”


하며 빨리 다음 길을 가라고 한다. 승진을 하든 창업을 하든 유튜브를 하든, 주식을 하든, 자격증을 따든 뭐든. 또 한 스텝 밟아야 연봉을 올리고,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으며, 내 아이를 더 넓은 환경에서 넉넉하게, 풍족하게 키울 수 있거든. 아니, 잠시만.

근데 만약 갑자기


“난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라고 하면 상대는 어떤 기분일까. 심지어 덧붙여,


“난 네가 부자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마 머리가 어지러울지 모른다. 그때부턴 상대는 여태 본인이 가졌던 인생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모든 게 상대적이다. 10만 원짜리 신발도 누구에게는 일상화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생일에 한번 신을 수 있는 신발, 신발이 없는 누군가에겐 평생의 행복이며 삶의 변곡점이겠지. 결국 부자와 거지, 풍요와 가난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상대적 영역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대적 비교 속 각자도생을 해야만 하는 현대사회에선 갈수록 경쟁과 질투는 만연하며 공감과 연민은 일어날리 만무하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선 대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통용된다. 경제학 용어다. 총 효용은 증가할지라도증가폭이 줄어든다. 경제적 풍요는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이전과의 동일한 개인의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근데 문제는 뭐냐. 여기서 대다수는 돈의 액수나, 소유한 무언가의 ‘양’의 영역에만 집착하지, ‘음’의 영역은 관심 밖의 문제다. 가난이 일정 수준 이하로 도달했을 때 혹은 극단적인 상황까지 봉착했을 때 그 불행과 고통은 특정 하한점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의식주 아니, 아슬하게 연명하는 삶에서 가장 원초적인 생명유지에 대한 걱정은 사치인걸까 당연한걸까. 아예 안 해도 되는 걸까. 주인공 자인이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꽃을 파는 여자아이의 대사는 뭔가 하나는 잘못됐다는 생각이 사뭇 들게 한다.


스웨덴에선 사람들이 병에 걸려야만 죽는대!



허구가 아닌 실제상황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너무나 당연한 의구심 속 참담함이 깃든다. 감독은 ‘현재의 내 삶에 감사하자’라는 알량한 합리화나 일말의 죄책감을 마치 예상이나 한 듯, 영화를 보는 성인 대중들에게 강한 비수를 꽂는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건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현주소라는 점이다.

레바논 시민들은 현재 본국을 탈출 중이다. 이란전쟁에 따른 여파 때문. 이 영화 주인공 자인의 삶도 다르지 않다. 아니, 오래전부터 그랬다. 나아진 게 없을뿐.

영화 제목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한 고대도시다. 예수가 기적을 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끝내 회개불가로 역사적 심판을 받은 곳.

반면, 이 곳 베이루트는 먹을 것이 없어 궁핍한 현실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조차 만무하다. 죄는 정당화하라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사는 도시 이 곳 베이루트. 회개하지 않은 도시라고 가버나움과 정확히 오버랩된다.


영화는 결말이라 할 수 있는 재판과정을 미리 보여주고 과거로 돌아가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는 플래시백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더 극적인 연출미가 나온다.

빈민가출신 자인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동생 사하르가 팔려가는 걸 보고 본인도 집을 나온다. 그리고 사하르는 팔려가 끝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하혈이 심해 죽는다. 부모와 매부는 그 어떤 죄책감 없이 아이를 돈으로 취급하며, 또다시 임신을 한다.

자인은 집을 나와 놀이공원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본인보다 더 못한 삶의 불법체류자 라힐을 만난다. 라힐은 없는 살림에 자인을 먹여주고 키워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라인이 불법체류로 잡혀가는데,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12살 자인에게 요나크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은 그 나이에 견디지 못할 버거움이다. 부모는 아이를 버리고, 그 아이는 갓난애기를 어떻게든 키우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날것 그대로 그려낸 이 시퀀스는 다소 과장된 감독의 화법이라 할지라도 영화를 보는 대중에게 극적인 현장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빈부격차, 마약문제, 의료의 부재, 여성차별, 난민, 지독한 빈곤, 불법체류자 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아우르는 이 시퀀스는 가히 충격적이고 감독의 예리한 시선이 여실히 드러난다. 카메라의 구도나, 배경이나, 실제 배우가 아닌 경험자가 열연하는 자연스러움은 대중들에게 하찮은 눈물을 선물한다. 그것도 시시때때로.그리고 그 눈물에 가려진 반성이 참 뭐랄까. 그 누가와도 해결할 수 없는, 움켜쥐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대중은 더 먹먹하다.


인생이 개똥 같아요.

본인도 공부하고 싶고, 정상적으로 잘 크고 싶고, 새로운 꿈을 꾸고 싶다. 12살의 꿈이라기에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근데 이 참혹한 현실에 그 어떤 필터도 없이 자인은 울분을 토하며 이 말을 내뱉는다. 인생이 개똥같다고.

자, 오늘 회사에서 상사한테 깨진 이야기, 감기에 걸린 이야기, 취업이 안 되는 이야기, 연인과 헤어진 이야기,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삶이 어렵다고 하는 그 어떤 누군가도 자인의 이 말 앞에서 반박없이 숙연해진다. 그저 가만히 듣고만 보고만 있다. 왜 부모를 고소했냐는 판사의 물음에 자인은 그 어떤 분노도 없이 덤덤하게대답한다. 그래서 더 소름돋는다.


절 태어나게 해서요


출생에는 자의적인 선택이 없다. 그냥 태어난다. 그리고 바꿀 수도 없다. 오로지 부모의 환경이 100% 좌우한다. 고귀한 생명이 이토록 원망이 되기까지, 그 원망의 원인인 어른의 무책임함을 묻는 자인의 질책에 100% 자유로울 수 있는 어른이 과연 있을까? 아무리 이게 후진국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라지만 대한민국에서도 자유롭진 못할테다. 중요한 건, 영화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관객도 그걸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과 성찰의 영역안에서 한 번쯤은 우리가 고민해 보길 바란 것 아닐까.

나는 타인의 고통을 돌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을까. 아니, 나아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감히 구원할 수 있을까. 내가 원했던 풍요의 두께는 몇 겹이었나. 그리고 몇 겹을 바라는가. 여태껏 조금이라도 가졌던 정신적 가난의 두께는 고작 얼마였나.

자인에겐 그게 얼마나 알량하고 하찮은 가난이었나.


아이는 잘못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의 당당함에 대중들의 각자의 삶의 고뇌가 오히려 부끄러울뿐.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이 돈이나, 각자도생 때문이라면 너무 부끄럽잖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 목 끝까지 올라온 울분을 참고 이 세상을 물려준 일말의 죄책감으로 그들에게 안녕을 바라본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자인은 실제 시리아 난민이다. 요아스는 케냐와 나이지리아 불법체류자에서 태어난 딸이며, 부모에게 팔린 딸 사하르는 실제 노숙자다.


이 영화를 제발 안 본 사람이 없길. 넷플릭스에 있어요.

현재 자인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