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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May 04. 2023

우리는 왜 종교에 기대는 걸까?

양산 통도사에서 60년 만에 나타나는 금개구리를 보다!

힘든 일이 있어 엄마와 통도사에 다녀왔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절 만한 데가 없다. 그 누구에게도 오라고 하지 않는데도 절은 사람들을 부르는 묘한 울림이 있다.  

 불교에 대해 오래 공부하지 않았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불교를 믿었던 부모님 아래서 자연스레 익힌 얕은 배경지식뿐이다. 절에 오면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관조’다. 관조란, 주관을 떠나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절에서 주는 비빔밥을 먹는다. 높은 곳이 보고 싶어 통도사 가장 위에 있는 암사에 간다. 이것이 관조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고요하게 지금 내 환경을 받아들이고 주변을 관찰하는 것. 이것이 정신없는 현대사회의 이해관계 속, 내면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삶을 더 편안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소방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낙방한 뒤 바로 이어 교통사고를 당하고 최근에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고는 병실에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는다. 삶에서 욕심을 버리고 관조의 삶을 사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모든 게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지하고 조금 더 내려놓고 그는 현재  또다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다.

금와보살

 양산 통도사의 끝 자장암에 다 달았을 때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금와보살님이 나와 계시다고 얼른 가보라고 한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오랜만에 스님이 방문하셨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개구리였다. 근데 색깔이 좀 달랐다. 입술이 금색이었다. 1,400년 전에 자장율사라는 스님이 수도하고 있을 때 옆에 이 개구리가 떠나지 않자 바위에 구멍을 내어 통도사를 짓기 전 작은 절벽 구멍아래 이 개구리를 넣고 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 개구리가 구멍 앞에 나타나면 행운이 따른다고 전해 내려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절벽아래 입이 금색인 금와보살님이 나와계셨다. 3월 10일 딱 하루 이후 이렇게 하루종일 나와계신 건 60년 만이라고 한다. 아무리 절을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몇십 년 간 보지 못하는 데 참 운이 좋다고 했다. 이건 길조임에 틀림없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종교의 힘에 기댄다. 마음의 안식과 위로해 줄 전지전능한 무언가 필요하기 때문일 테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종교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 걸까?


첫째, 운의 요소다. 인생에는 운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크게 작용한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들이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다. 승진이나, 결혼, 출세, 사업적 성공 이 모두 실력뿐 아니라 타이밍, 즉 운이 작용하는 요소들이다. 나 또한 정말 운이 좋아 책을 낼 수 있었고, 운이 좋아 마감기한을 넘겼음에도 대학 원서를 담당자가 받아주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순전히 운이 좋아 멕시코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단순히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100% 운 적인 요소도 분명 있지만, 실제로 매사에 사람들이 준비하고 겪는 무언가에 운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종교에 기대어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면 증명되진 않을지라도 나에게 좀 더 큰 운을 가져다줄 수 있게 하나님 부처님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그 운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 자체가 마음의 큰 위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찾아 종교를 가진다.


둘째,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종교에 기대어 마음의 위안을 얻음으로써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과 내재되어 있는 동기부여를 꺼낸다. 신이 나를 도울테니 나도 노력해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식이다. 수능이 백일 남은 자식의 어머니가 절에서 108배를 100일 동안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그 노력이 가상하여 그 자식에게 수능대박이라는 선물을 하사하지는 않는다. 마음은 종교에 기대지만 그 자식이 죽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혹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얻은 것이다. 단지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는 행동 그 자체에서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생긴다.

이는 무언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나 또한 작년 11월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내며 고향에 가 절에 한 번씩 가곤 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절을 하면서 든 생각은 곧 내 현재 환경을 변화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새롭게 글쓰기라는 것을 시작했다. 꾸준히 써 내려가니 아직은 미미하지만 책도 내고 내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질 수 있었다.


 셋째, 인간의 존재에 대한 사유다.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위대하다. 인류가 진화하며 손과 발을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고, 무리에서 도태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서로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현실에 빗대어 사회생활이라 하겠다)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스스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류역사상 유일한 생명체다.

 하지만 개개인의 인간은 들여다보면 한없이 나약하다. 앞서 설명했듯 과거 원시시대에는 무리에서 도태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내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환경에 놓인다. 그래서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를 형성하여 보다 강한 유대관계를 맺고 마을을 형성하며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만큼 나약하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충동적이며, 연약하고, 인내심 없고, 이기적이고, 질투하고, 욕심이 많다.  자연 앞에선 그저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다. 재난영화를 봐도 알 수 있다. 그 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도 자연재해 앞에서 그것을 100% 예방할 수 없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에 의지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신에 기대어 나약한 우리를 자연 앞에서 혹은 위기와 고난 속에서 구원해 주리라 믿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아무리 종교를 맹신한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혹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에만 종교에 의지하지 말고, 종교로 마음의 위안을 삼되, 스스로 생각을 달리 먹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 가장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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