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냄비 민족?
획일화와 개성의 균형에 대한 소고
넷플릭스 더글로리에서 연진이의 어릴 적 모습을 보며 공감 가는 것이 있다. 역 안에서는 아기가 하늘을 하늘색으로 그리지 않고 다른 색으로 그리면 주위사람들이 이 색이 아니라며 나무란다. 이솝우화에서도 하나의 동물이 색깔만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외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편으로는 노루 중에 흰색 노루는 '전설 속 영물'이라고 불리며 등장과 함께 뉴스 1면에 날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지난번 통도사에서 봤던 금 개구리도 마찬가지다. 기존과 다르다고 해서 외면받는 것이 아니라 더 칭송받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요소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 모호한 기준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각자가 가진 우리의 개성과 획일화에 대한 양면성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늘 말한다. 각자만의 개성을 가지는 것이 인생을 보다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고, 남들과 다른 본인만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이다. 해외에서 단 한 번이라도 체류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다. 각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본인만의 삶을 대하는 바이브와 철학을 절대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뽐낸다. 남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웃통을 벗고 조깅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자퇴를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여태껏 겉으로는 본인의 개성을 강조하면서도 철저히 시스템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묵살해 왔다. 다 같이 획일화된 행동과 신념을 보임으로써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민족의 중흥의 사명을 딛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유신체제의 박정희 대통령 때의 유신헌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주어진 사회에서 머리는 몇 cm이상 기르면 안 되고, 치마는 일정 기준 이상 짧으면 바로 경찰서로 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어쩌면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곧 불법이었다. 수업 중 질문 하나 하는데도 남 눈치를 보는 한국인인데 말 다한 것이 아닌가.
유신체제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내 경험을 비추어봐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는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라고 선생님께 배우며, 중 고등학교 때 다 같이 교복을 입던 시절은 "남들과 똑같이 시키는 것만 하라"라고 강요받는다. 이렇게 큰 우리들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본인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세요'라며 다시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다. 중고등학교 6년간 자유를 억압당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노는 것이고, 무엇을 해야 개성을 드러내는 건지 잘 모른다. 그래서 고3수능이 끝난 학생들은 정작 놀아라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몰라 남는 시간을 허비하기 싫어 운전면허학원을 등록하거나, 친구들과 밤새 모여 술만 마신다.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삶은 왜 중요할까? 내 개성과 철학의 부재는 남에 이끌려 사는 수동적인 삶만 가져온다. 취업을 할 때 되서까지도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모른 채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결정을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한다. '엇, 내 친구가 공무원을 하면 나중에 연금도 나오고 잘리지도 않고 안정적이래! 나도 해봐야지' 이런 식이다. 남들은 yes를 외칠 때 나는 당당히 싫다 no를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남들이 가는 길이 아무리 안정적이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었던 것을 밀어붙이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 스스로를 내면적으로 꾸밀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느라 자신의 개성이 묵살당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이든 사회밖이든 내 인생에서 하루 24시간 중 단 한 시간이라도 나만의 개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래퍼들은 늘 말한다. 'I dont give a f**k!'
직역하면 내 주변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에 비유하자면 누가 뭐라 하든 내 길을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왜 사는가?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 역량을 표출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인정해 줄 때 재미있는 것이다. 메슬로의 피라미드를 보더라도 인정의 욕구는 4단계로, 인간이 누리는 정점의 행복에 가깝다. 인정이 채워져야 자존감이 생겨 5단계 즉, 마침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가? 당장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다. 먹고살려면 돈은 벌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은 축복받은 삶이다. 왜 축복받은 걸까?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조직에서 그 삶을 살아간다 해서 내 개성을 영원히 찾지 못한다라는 흑백논리적인 시각은 옳지 않다. 모든 조직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본인만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극단적인 선택은 지양하고 늘 정도에 맞게 생계유지에 필요한 내 일을 하되, 조금씩 내 개성을 찾아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개성이 묵살당한 획일화된 삶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냄비근성과도 연결된다. 냄비근성이란 라면을 끓이는 양은냄비와 같은 인간의 의식적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 쉽게 달아오르고 금방 식어버린다. 대한민국 국민은 특정한 이슈가 있을 때 불같이 달려들었다 잠깐, 아니 일주일이 지나면 완전히 잊어버리고 시큰둥해진다. 이는 인터넷상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한 연예인을 싸잡아 공격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신상을 파내어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대개 이러한 일들은 작은 일도 더 큰 일로 만든다. 커피가 인기 있으면 50m로 카페를 연달아 창업한다. 10중에 9는 망한다. 심지어 본인이 왜 망했는지도 모른다. 치킨 열풍이 일어나면 너도나도 퇴직 후 퇴직금 전재산을 털어 치킨집을 연다. ‘네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이걸 하면 큰돈을 번다’라는 맹목적 믿음일까.
이런 획일화, 냄비근성은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협동으로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월드컵 2002년 신화를 보면 전 국민이 광화문에 우르르 모여 열광하는 장면은 전 세계의 매스컴을 타며 감탄을 자아냈다. 뿐만 아니라 태안 앞바다의 자원봉사, IMF때의 금 모으기 운동은 내 혼자 손해를 보더라도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위기 속에서 구해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군필자들은 모두 군대에서의 괴로운 기억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어울리며 쌓았던 전우애라던지, 그때 그 순수했던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만약 전쟁을 선포하고 쳐들어온다면 거의 대부분의 예비군들은 앞장서 나라를 구해낼 것이다.
그 어느 것도 틀린 건 없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럽게 내 삶을 여기에 맞게 꾸며가야 한다. 딱 네 가지로 요약하자면,
1. 주변의 눈치를 보며 내 선택이 아닌 것에 이끌리지 않는 것.
2. 정해진 기준에 너무 매몰되지 말라는 것
3. 조직 안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4. 책을 읽든 뭐든 좋다. 단순반복이 아닌 내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루 단 십 분이라도 하는 것.
이게 냄비근성이 두드러지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현실성 있는 답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