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임을 인정하기
한국에서 살면서 우물 안 개구리로는 살면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나 역시 그 말에 힘입어 우물 밖 세상을 향해 기어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막상 우물 벽을 오르다 머리를 빼꼼 내밀어본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 찾아왔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갇혀 있던 우물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개구리라는 사실. 내가 개구리라는 자각은 꽤 불편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환경 탓만으로는 나의 한계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물이 좁아서 세상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개구리인 내가 가진 한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였다.
누군가 말했듯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면, 개구리로서의 나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그저 순응하는 개구리가 아니라 생각하는 개구리가 된다. 생각하는 존재라면 단순히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우물 밖 세계가 넓다는 사실만 깨닫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세계 안에서 내가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자 존재의 확증일 것이다.
이곳의 하늘은 늘 높고 푸르다. 그러나 그 하늘을 본다고 해서 곧장 내가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새가 아니다. 그리고 나라는 개구리는 날개가 없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뛸 수는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개구리로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뛸 수 있는 힘과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나만의 소리를 나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린디에서의 삶은 그 질문을 날마다 나에게 던져준다. 시장에 가면 언어의 벽 앞에서 작아지고, 회의 자리에서는 익숙지 않은 리듬 속에 초라해진다. 그러나 이 작은 좌절이 곧 나의 우물 밖 경험이다. 사람들과 스와힐리어로 몇 마디 주고받을 때, 아이들이 내 발음을 흉내 내며 웃을 때, 나는 개구리로서 어디까지 뛸 수 있는지를 실감한다. 새처럼 날 수는 없지만, 뛸 수 있는 힘과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개구리가 새를 흉내 내며 하늘을 날겠다고 집착하는 건 꽤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부정의 비극이다. 나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길이 있다. 나라서 할 수 없는 일 대신,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때, 나의 존재는 가장 나답게 빛난다. 자기 존재를 의심함으로써 오히려 확고해 지는 것처럼, 나는 내가 개구리임을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그 우물은 감옥이 아니다. 오히려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우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세상을 본 순간, 나는 개구리임을 자각했고, 그 자각은 곧 내 존재의 선언이었다. 개구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조건 안에서 어떻게 뛰고, 어떻게 울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는 순간부터 삶은 달라진다.
세상을 내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