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 대하여
아이스브레이킹엔 MBTI를 안 물어보면 섭섭할 정도로, MBTI는 이미 한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처음엔 심심풀이용 심리 테스트쯤으로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판단하는 일종의 지표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자칭 INFJ인 나는 이상하게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쌤, T죠?"
"근데 너 T 아니야?"
그럴 때마다 나는 좀 의아했다. 나 정도면 공감도 나름 공감도 잘하고, 상대방의 감정도 잘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사람들은 나를 T라고 말하는 걸까. 그러다 문득 내가 고민을 들을 때 자주 하는 말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건 이렇게 해보면 어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봤을 땐 그냥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뭐 이런 말들. 상대방이 고민을 얘기했을 때, 사실 누군가에게 고민을 말하는 건 해결책을 제시해달라는 이야기 아닌가? 크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어쩌면 상대방이 그 순간에 진짜 원했던 건 방법이 아니라 아주 조금의 마음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 공간마저 팍팍한 현실적 조언으로 채워버렸지. 진심으로 난 돕고 싶어서였지만, 정작 상대는 위로받지 못한 채 대화를 끝냈을 수도 있겠고.
최근 친구가 힘겹게 끝난 연애에 여전히 아파하며 나에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눈빛도 축 처지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았다. 그 친구는 아마 내게 감정을 나누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나는 "그냥 잊어버려. 걘 너 생각도 안 하고 있음. 너 이러는 거 시간 아깝지 않냐"라고 툭 내뱉었다. 그 말이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날 대화를 끝냈다. 친구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냥 같이 시시콜콜 전에 만나던 사람 이야기나 하면서 전 애인을 잊어보려고 꺼낸 말일 수도 있는데, 나에게 돌아온 말은 해결책, 그것도 괜찮은 해결책도 아닌 그냥 아 그만 좀 해라~ 같은 뉘앙스의 말이라면.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적이 많았다. 마음이 무거워서 누군가에게 얘기했는데, 돌아오는 건 “그건 네가 잘못했지” 같은 말들이었을 때. 그 말을 듣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마음은 더 닫혔다. 결국, 해결은커녕 외로움만 더 짙어졌던 기억. 곱씹을수록 친구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해결책을 원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때로는 그냥 누군가 내 말을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도 숨이 조금은 덜 막힐 때가 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랬구나”라고 해주는 사람이 더 위로가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대화를 시작할 때 이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할 땐, 해결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냥 연결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자주 입을 닫고, 귀를 열기로 한다. 내 말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걸 이제 잘 아니까.
결국 대화의 목적은 해결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것.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나는 나와 다른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