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넘기다 손끝이 멈춘 건, 오늘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종이가 유난히 거칠어서였다. 밤새 선풍기를 두 개씩이나 세게 틀어놓은 탓인지 방 안 공기는 늘 메말라 있었고, 달력의 모서리도 같이 말라비틀어진 느낌이 났다. 나는 손가락으로 날짜 칸을 한 번 문지른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봤다.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닫힌 창문은 내게 어떤 약속 같았다. 오늘도 열지 않을 거라는, 그러니까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외투를 걸어둔 의자와 어젯밤에 벗어던진 양말이 그대로였다. 싱크대엔 컵이 두 개, 라면 국물 냄새가 아주 조금. 전기포트는 물을 다 비워낸 채로, 누가 쓰다 말고 잊어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이 내 하루를 설명하고 있었다. 시작이 없는 하루. 시작을 자꾸 미루다가 결국 미루는 것 자체가 습관이 된 하루.
창 밖에서는 새가 울었다. 아침에 새가 우는 게 원래 이런 소리였나, 생각하다가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원래 같은 건 없었다. 내 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우기든 건기든, 내가 창문을 닫아놓으면 늘 비슷한 톤으로 걸러져 들어왔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어도 나는 잘 몰랐다. 달력에 적힌 글자들만 믿고 살아왔다. 그때 문 밖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소리가 났다. 초인종도, 노크도 아니었다. 마당 건너편, 문 밖 어딘가에서 비닐봉지가 스치는 소리, 누군가 발끝으로 바닥을 밀며 지나가는 소리. 나는 숨을 죽였다. 요즘은 누가 찾아오는 게 싫었다. 찾아오지 않으면, 나도 누군가를 만나러 갈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가 없으면, 시작도 없다. 이상하게도 목이 잠겼다. 따뜻한 걸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포트를 씻어 물을 채웠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전원을 누르고, 컵을 꺼내고, 티백을 찾았다.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닫았다. 그 과정이 이상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의 동작 같았다. 나는 살아있구나.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달력을 다시 봤다. 코이카에서 보낸 달력의 날짜 칸 한쪽에 아주 작게 적혀 있는 글자. 입춘. 나는 그 글자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 해마다 그냥 지나쳤던 단어이자 어떤 계절이 시작된다는 신호. 그런데 그 신호를 나는 단 한 번도 내 생활에 연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계절은 알아서 변하고, 나는 알아서 멈춰 있었다.
물이 끓자 김이 올라왔다. 김은 정적을 조금씩 밀어냈다. 나는 컵을 들고 창문 앞에 섰다. 손잡이에서 전해지는 뜨거움이 너무 현실적이라, 한순간 어지러울 정도였다. 나는 망설였다. 창문을 열면 습한 공기가 들어올 텐데, 습한 공기가 들어오면, 방 안의 그대로 있는 많은 것들이 무너질 텐데. 그대로 있던 많은 것들이 무너지면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를지도 몰랐다. 그래도 손은 창문 손잡이를 잡았다. 금속은 차가웠고, 나는 잠깐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 그리고 힘을 줘서 열었다.
습한 바람이 들이쳤다. 빗방울의 냄새가 아니라, 빗방울이 물러나기 시작하는 냄새였다. 습한 흙냄새가 아주 살짝 섞여 있었다. 아직 건기라고 부르기엔 이른 공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 없는 공기가 나를 안심시킨다. 이름이 없으면,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이니까.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창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커튼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나는 갑자기 생각했다. 하루의 시작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고. 전기포트에 물을 채우는 것, 창문을 여는 것,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나는 오늘을 살았다는 문장이 생길 수도 있다고.
나는 오래 미뤄둔 것들을 떠올렸다. 빨래, 청소, 장보기, 연락, 운동. 그 목록은 늘 내 머리 한편에서 썩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목록이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고를 수 있는 것들처럼 보였다. 오늘은 빨래부터 해볼까, 아니면 먼저 몸을 씻어볼까. 선택지가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줬다.
나는 욕실로 가서 물을 틀었다. 찬물이 먼저 나오다가, 조금 뒤에 미지근한 물이 섞였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어제와 똑같았지만, 눈동자만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맑아 보였다. 그게 정말 맑아진 건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와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차이를 내가 알아차렸다는 사실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방 안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공기가 들어오면서, 불쾌한 냄새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바닥에 널려 있던 양말을 주워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은 퇴근하고 빨래를 해야지. 그리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오래전에 이집트에서 사둔 투탕카멘 노트가 펼쳐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노트 위엔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먼지를 쓸어냈다. 종이 위에 손자국이 남았다. 그 손자국이 왠지 여기서부터라는 표시처럼 보였다.
펜을 잡고 첫 줄을 썼다.
입춘
쓰고 나서 나는 잠깐 멈췄다.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처럼, 혹은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처럼. 첫 문장을 쓰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무섭다. 첫 문장을 쓰면, 두 번째 문장을 써야 하고, 두 번째 문장을 쓰면 이야기는 계속되니까. 계속된다는 건 책임이고, 책임은 부담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무서움이 아주 작았다. 창문 밖에서 바람이 또 한 번 불었고, 커튼이 흔들렸다. 컵 속의 차는 아직 따뜻했다. 방 안에 살아 있는 소리가 많아졌다. 소리들이 내게 말했다. 네가 첫 문장을 썼으니, 다음도 써도 된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두 번째 줄을 썼다.
오늘부터 시작할 것들.
그렇게 쓰고 나니, 쪽지의 문장이 내 문장이 되었다. 누가 나에게 던져준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하는 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다음을 떠올렸다. 오늘은 밖에 나가 빵을 사 올까. 햇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볼까. 나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열쇠를 넣고, 문을 열었다. 대문을 잠그며 나는 생각했다. 입춘은 봄이 완성됐다는 뜻이 아니라,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라고. 시작은 늘 부족하고, 어설프고, 조금 춥다. 하지만 그래도 시작이다. 문이 닫히고,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바깥의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고, 그 안에 아주 작은,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