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늘 신기해한다. 내가 군복무하던 지역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고, 눈이 키보다 더 높게 쌓인다는 나의 말에 허풍 떨지 말라는 식으로 웃기도 하면서. 산에 쌓인 눈이 녹아 봄에는 물이 되고, 그 물이 계곡을 만든다는 설명을 하면, 사람들은 내 손바닥을 펴서 빗방울을 받아 보이며 깔깔거린다. 여긴 처음부터 물인데? 탄자니아가 한국보다 더 좋은 나라야 맞지? 엥 눈이 안 오면 좋은 나라이려나? 의도를 알 수 없는 그들의 애국심 같은 것에 나도 깔깔거린다.
탄자니아에는 눈이 없고, 겨울도 없다. 대신 붉은 흙과 바나나 나무, 그리고 우기가 있다. 비가 시작되면 길은 사라지고, 집은 소리를 얻는다. 비가 만드는 양철 지붕의 북소리가 새벽마다 나를 깨운다. 오늘도 그랬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지붕이 먼저 말을 걸었다. 땅 땅 땅, 땅땅땅. 나는 모기장을 걷고 일어나 운동을 하기 전 찻주전자를 올렸다. 우기에는 자주 전기가 끊기고, 전기가 들어올 때만 쓸 수 있으니 오늘 같은 날은 타이밍이 중요했다. 늦게 켜면 퍽하고 전기가 꺼지면서 하루 기분까지 같이 꺼져버린다. 다행히 불빛은 버텼고 물은 끓었다. 컵에 생강을 잘라 만든 생강청을 조금 넣고 김을 들이켰다. 코끝이 따끔해지며 잠이 풀렸다. 달력에는 내가 써놓은 글자가 하나 보인다. 우수. 한국의 24 절기마다 글을 하나씩 써보자는 생각으로 달력에 써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피식 웃었다. 우수에는 눈이 녹아 물이 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고 한다. 내 기억 속 이맘때의 한국은 얼어붙은 것들이 몰래 느슨해지는 날이었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 굳어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펴지고, 길가의 눈더미가 가장자리부터 허물어지던 날. 꽃샘추위가 오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면서 봄옷을 쇼핑하던 그 정도의 절기랄까. 그런데 지금 나는 이미 물이 넘치는 곳에서 녹는다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뭐 조금 기분은 이상하지만 싫진 않았다. 뭐든 단단했던 게 풀리는 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 같아서.
나는 이번에 새로 산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방글라데시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는 늘 장화를 신고 다녔었는데' 같은 생각을 하며 잠깐 웃었다. 집 앞의 붉은 흙길은 밤새 반죽처럼 변해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들어갔다. 이 정도로 비가 많이 왔나? 바다에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넘쳤나? 바다는 조금 덜 짜졌겠는데? 같은 다소 문과스러운 상상을 하며 흙길을 넘어 아스팔트길로 나왔는데, 그곳에도 물이 고여 있었다. 배수로를 넘어 고여버린 물은 마치 자기 집을 찾은 것처럼 당당했고, 그 위로는 배수로 위로 낸 작은 다리들이 끊겨 있었다. 우기에는 이런 장면이 참 많다. 그저 오늘은 집 앞의 내 발 앞에서 시작됐을 뿐이다.
끊어진 다리 아래로 배수로를 들여다보니 잎사귀와 비닐 조각, 나뭇가지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물은 그 덩어리를 밀어내지 못하고 돌아서며 길을 잃었다. 배수로를 뚫어볼까 하다가, 칼을 들고 나오는 이웃을 보고 조금 돕는다. 일찍 나오길 잘했는데 싶었다. 한 20분쯤 같이 배수로를 뚫다가 다시 나는 비를 뚫고 사무실에 도착해 비가 떨어지는 지붕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깐 비를 구경했다. 빗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내 머릿속에 아침에 본 달력이 다시 떠올랐다. 우수, 여기에는 눈이 없는데도 내 안에는 녹는 것이 있었다. 우기 동안 나는 종종 마음을 딱딱하게 굳혀놓는다. 길이 끊겨도, 일정이 밀려도, 통신이 끊겨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러다 보면 나 자신도 같이 얼어버린다. 오늘은 그 얼음이 아주 얇게 금이 간 느낌이었다. 그냥 글을 하나 쓰고 있을 뿐인데.
젖은 장화를 벗고 바닥에 뒤집어 놓았다. 장화 안에서 물이 한가득 흘러나왔다. 나는 그 물을 보고 또 웃었다. 우기에는 내 몸도, 물건도, 하루도 쉽게 마르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았다. 막힌 물길 하나가 뚫린 것처럼, 내 마음에도 아주 얕은 홈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오늘은 한국의 명절이 끝나는 날인데, 본부에는 근무자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원들도 다 필드에 나가서 나는 핸드폰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메모장을 열어 오늘 할 일을 적는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퇴근길에 집 앞 배수로 한 번 더 보기. 사무실 물통 비우기. 보고 싶은 누군가에게 한 문장 보내기 같은. 마지막 줄을 쓰면서 잠깐 망설였다가, 멀리 있는 보고 싶은 누군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볼까 하다가 마음을 금세 접는다. 여긴 비가 온다고, 근데 오늘은 좀 괜찮다고, 넌 어떠냐고 묻고 싶었는데 뭐,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날이 있겠지.
다시 빗소리가 커졌다. 사무실의 양철 지붕도 성실하게 북을 쳤고, 처마 끝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아침에 본 달력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우수. 단단한 것이 풀리고, 물이 길을 만든다. 오늘 내가 본 우수는 물은 길을 찾고, 사람은 길을 낸다. 그리고 그 작은 길 하나가, 다음 발걸음을 가능하게 하는 날이었다.
사무실의 전기가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고, 창고에서 촛불을 찾아 켜본다. 밖에서 부는 비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가 다시 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지 같은 생각을 했다.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서는 것, 겁을 먹고 움츠렸다가 다시 서는 것. 산다는 건 결국 그 반복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둥둥둥 천장 소리를 듣는다.
밖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내 안 어딘가가 아주 조금 따듯하게 말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