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에 남는 것들
사과문을 읽을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남는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말했는데 그다음 문장은 비어 있을 때가 있다
책임을 통감한다, 깊이 반성한다는 말은 반복되지만
그 말이 도착하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감정은 절제하는 듯하지만 지나치게 재단되어 있고 구조는 뻔하다.
여기까지는 정치도, 연예도 아니다.
그냥 사과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이다.
방송 일을 하다 보면
말은 늘 가장 싸게 쓰이는 자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말은 빠르고,
그래서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동원된다.
누군가 사과를 하려면 모두가 타이밍을 조절한다.
타이밍 그 이상의 것은 별로 없다. 그리고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질문을 만들다 보면 회피가 가장 잘 보인다
전략은 단순하다.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최소한으로. 어차피 사람들은 첫 메시지만 기억하고 며칠 뒤엔 잊을 거라는 믿음이 사과문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된다.
반성은 말로 시작하지만 증명은 다른 곳에 남는다.
편집되지 않은 숫자,
보도자료에 나오지 않는 처리 방식,
카메라 밖에서 결정되는 선택들. 직업적으로 봐왔던 거다.
그래서 사과문을 읽다 보면
말로 풀이되지 않는 빈터를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은 어떤 항목으로 비용을 처리했을까. 지불의 방식은 카드였을까, 이체였을까. 그 증빙은 어떤 이름으로 남았을까.
이 질문은 고발도 아니고 추궁도 아니다.
도덕의 영역보다 한참 아래 있는 시스템의 영역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우리는 대부분 선의보다 규칙을 믿고 살아간다.
사람의 마음보다 기록을 신뢰하고,
진정성보다 증빙을 요구하는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기록이 보이지 않으면 공백이 남는다.
그래서, 그다음은?
말 다음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