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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이 Jul 04. 2024

가장 낮은 바닥에서

 여느 날처럼 열린 창문 틈의 습한 바람을 느끼며 의미없는 스크롤링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울린 전화와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만이 다를 뿐이었다.


 동생과 술래잡기나 하던 어린 시절 이후로는 조부모님과의 추억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단지, 명절이 되면 다른 친척들 몰래 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넣어주시던 지폐와 고봉밥 위에 생선을 발라 얹어주시던 쭈글한 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딘가 여행한 기억은 고사하고 오가는 대화도 없었다. 대학을 가고 직장을 다니며 물리적 거리와 함께 마음의 거리도 멀어졌다. 그런데 찾아뵙기는커녕 연락도 드리지 않고, 정도 없던 손녀의 직장에는 왜 찾아오셨던걸까? 그 즈음 나는 이미 퇴사 후에 해외에 있어 회사에 있지도 않았다. 무작정 내가 보고싶어 우두커니 회사 앞을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난 번 한국에 들어갔을 때 찾아뵐 기회가 분명 있었다. 친가와 외가 할아버지가 모두 아프셔서 위중한 상황인데도, 나는 짧은 일정 내에 처리해야 할 일을 소화한다는 이유로 매번 다음, 다음으로 미루곤 했다. 단지 나는 내 삶을 누리고 싶어 시작한 거짓말인데, 나와 함께 거짓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나눠가지고, 속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걱정하거나 응원하게 되었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이 더 이상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삼우제가 지나고 세상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속절없이 흘러갔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를 얽매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 삶을 지탱하던 신념들은 어디로 흐트러지고 어째서 멀리하던 것들을 받아들였나, 나의 끝없는 무기력함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 속을 헤집는 질문들로 며칠을 밤을 새웠다. 내게 남은 건 보잘것 없는 커리어와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통장 잔고 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이방인이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수많은 기회들을 노렸으나 별 시덥잖은 이유로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뇌의 어딘가 고장나서 회로가 엉망이 되어버린게 분명해, 라며 넘겨 짚었다. 그러다 몸 속에 들어오는 알코올을 비롯한 각종 화학물의 힘을 빌려, 밀려오는 도파민으로 일주일을 버티곤 했다. 취한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절하듯 잠든다. 아,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고 싶었는데..


 곁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아 마음 툭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도 없다. 오죽하면 두 번 본 사람에게 충동적으로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의 우울감을 가볍게 털어놓았을까. 심지어 돌아오는 답변은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였다. 웬걸,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다 이까지 흘러왔는지 지난 10개월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가며 눈 앞을 흐리게 하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실소가 나왔다. 몇 년전 취업준비를 하며 지금과 비슷한 우울을 느낀 것이 떠올랐다. 나의 불안과 무력감은 단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몇 안되는 내 신념 아니던가.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후회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것은 단지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느리게 흐르다 멈췄던 초침이 눈 앞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 훈련과 일관성. 지나치게 이성적인 충고였으나 결국 지금의 내가 무조건 따라야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이 다시 내 곁에 오게 하려면 더 이상 막대 빠진 허수아비처럼 무력하게 살아서는 안된다. 틈을 주었다가는 관성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더 이상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거짓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해서 그것이 모두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날을 만들고 싶다. 그래, 그렇게라도 되어야 이번에는 내가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자랑스럽게 그 과정들을 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사과드리고 싶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길을 잃어서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잊었다고, 죄송하다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의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오롯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그거 하나만으로도 지금은 괜찮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스스로 과대평가 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배워가는 마음가짐을 가지고서.

 제가 내딛는 첫 걸음에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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