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차라리'는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아니, 자주 하는 생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단한 일이 끝나고 혼자서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밤길에 저는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좋겠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머뭇대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때문에 들썩이는 밤이면 '차라리 마음이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조명 하나만 밝혀 둔 채 낮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잠만 잘 수 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이불킥만 연달아해 대는 밤에는 '차라리 죽자, 죽어.'라고 생각하고요 가끔씩 까닭 없이 아주 많이 울적한 날이면 '차라리 세상이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제가 글을 쓸 때 자주 하는 말도 떠오릅니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이동진 영화평론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많이 쓴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동진 평론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그분의 글을 열독 하는 한 독자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요. 저는 그 뒤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삶이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온통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는......
'차라리'라는 단어 뒤에는 대개 부정을 의미를 담는 표현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끝은 언제나 '~좋겠어.'라고 끝나더라고요. '차라리 세상이 끝나버리면 좋겠어.'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좋겠어. 흔적도 없이. 온 데 간 데도 모르게.' '차라리 영원히 잠만 잘 수 있으면 좋겠어.'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라는 말(생각)만 반복하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며 생각의 방향을 틀지 않으면 영원히 어두운 심연으로 빨려가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내 글은 쓰레기야, 내 글은 겉멋만 잔뜩 들었어, 내 글은 너무 뻔해.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자, 다시 써보자. 이렇게 고쳐보자. 이 단어를 바꿔보자.라고 방향을 약간 틀어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저는 어떤 좋지 않은 일 한 가지, 그리고 좋았던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요 역시나 '차라리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오늘은 이런 좋은 일도 있었잖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차라리'라는 단어에는 '이 편보다 그 편이 (훨씬) 더 나(았)를 텐데.'라는 후회의 정서(?)가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최선보다는 차선을,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쨌거나 저뿐만 아니라 많이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차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이에서 후회하고 흔들리면서. (이런 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한다죠?)
저 또한 언제까지 '차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반복을 견디며 살 것 같아요. 때로는 지긋지긋하기도 한 이 삶에 이런 단어들마저 없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까요.
'차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제가 좋아하는 말이자,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